모든 여행이 그러하겠지만 이번 크루즈여행의 마지막은 지난 여행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국으로 미치도록 돌아가기 싫었던 LA여행때와는 달리 이번 여행은 다시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감사함과 함께 호강을 누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원체 크루즈여행이라는 것이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여행인 데다가 순전히 이모의 도움으로 온 여행이니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오로지 배 위에서만 보냈던 여행 마지막날은 여타 내가 해온 다른 여행들과는 달리 평안한 날이었다.
늘 그렇듯이 마지막날에도 나와 이모는 각자 휴식을 취하다 만나기로 하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늘 앉던 창가에 앉았는데 크루즈 굿즈를 발견했다. 직원들이 꼭꼭 숨겨놓은 굿즈를 승객들이 찾아내면 갖는 시스템이었는데 마지막날 우연히도 발견한 것이다. 며칠 전 이모가 찾아주신 분홍색 오리도 있었지만 내가 발견했다는 이유로 노랑오리에 더욱 애정이 갔다. 그렇게 이모와 따로 혹은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마지막으로 뮤지컬공연을 관람했다.
뮤지컬은 공연장 밖에서도 이어졌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와 힘 있고도 아름다운 목소리에 매료되어 공연을 감상했다. 이윽고 공연이 끝이 났고, 잠자리에 들자 여행이 진정 끝이 났음을 실감했다. 감사하게도 이모와 이모부께서 다음날 공항까지 데려다주셨고, 계속되는 기침을 조심하면서 체크인 후 면세점에 들렀다. 힘들게 카드지갑을 찾아 헤매다 결국 J에게 선물할 지갑을 고른 뒤 가족들에게 줄 선물, 그리고 나를 위한 작은 곰인형을 구매했다. 아빠가 마중 나와주신 덕분에 편안하게 캐리어 2개를 끌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피곤에 짓눌려 반은 정신이 몽롱한 채 하루를 마감했다.
여행을 통해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여행 때마다 얻어가는 것들이 있었다. 유럽 배낭여행 때에는 그야말로 시야가 넓혀졌고, 호주 여행 때에는 휴양지에서의 고독함을 느껴보았으며 LA여행 때에는 내가 사랑하는 영화촬영지를 돌아보며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남은 이민의 꿈도 그 여행을 통해 매듭질 수 있던 것 같다.
이번 크루즈여행은 무엇보다 이모와 둘이서 내밀한 대화를 속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과 내가 어릴 적부터 롤모델로 삼았던 이모의 삶을 다시금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무대에 거침없이 나가서 춤을 추시는 이모를 보고 젊으실 때를 상상해보기도 하였으며, 이모의 젊은 시절을 들으며 그 속에서 나를 떠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장기공부를 처음 시작하던 때여서 공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던 터라 이번 여행을 통해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더불어 이모는 당신이 젊었을 때 당신과 같은 이모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말뜻이 무엇임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맨몸으로 부딪힌 당신의 젊은 날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조카가 그대로 당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걷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 다행히 베풀 수 있는 지금의 다행스러움 등이 녹아있는 말이었다. 그 말에 감히 내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이모 같은 이모가 계셔서 나는 복 받은 조카임이 틀림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제는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헛헛한 마음과 아직 다 못 버린 이민의 아쉬움 등으로 눈물짓던 내가 이번 여행만큼은 온전히 여행으로서 즐기고 올 수 있었다. 유럽이던, 호주던, LA이던 언제나 울적하던 귀국길을 의연하게 돌아오니 내 안에서 무언가를 진정하게 마침표 찍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도하지도 못한 이민과 유학의 꿈을 여행으로 마무리 짓고 보니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도 여행에 대한 향수병은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이 괴롭지 않았던 유일한 여행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