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도서관저널 <낭만사서의 선곡 라디오> 연재를 마치며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꿔왔음에도 내가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생각은 쉽게 하지못했다. 글을 납품하여 고료를 받는다는 것은 프로들의 세계에서나 생길법한 일인데, 나같은 작가지망생이 그럴 일이 찾아오나싶은 마음에 언감생심 꿈도 못 꾼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운명처럼 찾아왔다. 당시 학교도서관저널에서 작가지망생 특집으로 인터뷰를 청하고자 브런치를 통해 기자님이 연락하셨고, 그 일을 계기로 몇 편의 짧은 토막글을 원고로 보냈었다. 그 후 지면에 내 글만 실리는 코너를 연재하기까지의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제안을 받은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영광이었으며, 겁이 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절할 리 만무한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내 글이 처음 코너에 실렸을 때의 환희란. 10년동안 블로그에서만 혼자 써오던 글이 모여 브런치작가에 통과했고, 이후에 브런치를 통해 잡지코너를 연재하는 필자가 되었다. 모든 공모전에서 낙방한 처지임에도 이 곳을 마냥 미워할 순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2년반 가량 코너를 연재하면서 내가 세운 철칙은 3가지였다. 반드시 주제는 명확할 것, 소재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곡을 찾아낼 것, 왠만하면 마감일보다 하루 이틀 원고를 빨리 제출할 것. 다행히도 이 3가지가 잘 지켜진 덕분에 별 탈없이 코너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연재 때는 긴장감도 있던 터라 <낭만사서의 선곡라디오>의 그 낭만사서가 나임을 쉽게 실감할 수 없었지만, 연재가 끝나자 자신감이 이자 붙듯 불어났다. 기나긴 시험을 통과한 것 같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절친한 친구와 헤어진 느낌마저 들었다. 매 해 새로운 곡을 선정하고 이에 맞는 내 생각을 잘 정돈하여 빚는 일이 나에게는 매번 새친구를 사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한 번 내 손을 떠난 글은 지면에 실리고나면 더이상의 수정이 불가능했다. 필자이자 독자이던 나의 시기는 서로 달랐기에 가끔은 남이 쓴 글을 읽는 것과도 같았다.
코너를 시작하며 나를 처음 알아봐주신 기자님, 편집장님, 매번 정성스러운 답메일을 보내주셨던 두번째 담당기자님께 한번도 감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연재가 끝나고 인사를 드리며, 유퀴즈에 내가 나온다면 꼭 학교도서관저널을 언급하겠다는 말씀도 드렸다.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10년전 쯤에 친구와 연극을 보러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관객을 대상으로 배우들이 퀴즈를 내서 정답을 맞춘 이가 상품을 받아가는 시간이었다. 한 배우가 마지막 선물로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고, 그 안에는 본인의 사인이 적혀있었다. 다소 실망한 관객에게 그 배우는 자신이 언젠가 대배우가 될지 모르니 그 사인을 소중히 간직해야할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장면이 성인이 되고나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로 남았다는 것을 그 분은 알고계실까. 이후 나는 같은 마음으로 작가용명함을 따로 파내어 기회가 되면 건네고 다녔다. 혹시 모르지. 내 명함도 언젠가는 유명한 작가가 스스로 만든 첫 명함이라며 박물관에 전시될 날이 올지도.
이상하다. 정말 언젠가는 내가 쓴 글이 책으로만 나올 것 같고, 공부가 끝나면 쓰고싶은 소설이 입소문을 타 드라마화가 될 것만 같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글쓰는 사서라고 소개되면서 유퀴즈 류의 프로그램에 나와 내 이야기를 하게될 것만 같다. 그리 된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계신 분들에 대해 꼭 말을 해야지. 여러분이 읽고있는 지금 이 글의 필자가 언젠가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작가가 되겠노라 약속했다고. 그 때되면 '아, 나 저사람 글 오래전부터 읽어왔는데'라고 당당히 이야기하시길 바란다.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당신이라면 내 성공에 충분히 일조하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