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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Nov 04. 2018

[D+11] 타롱가 주 / 운수 좋은 날

시드니 최대 동물원, Taronga Zoo에 입성하다

나는 허술하다. 반드시 준비가 필요한 일들(가령 워킹홀리데이나 유럽여행이라던지)에서는 꽤 꼼꼼한 면모를 보이지만 그 외 모든 면에서 나는 많이(매우) 허술한 편이다. 이를테면 핸드폰을 물에 빠트리지 않거나 액정을 박살 내지 않고 써본 적이 없으며 물건은 걸핏하면 잃어버리기 일쑤요, 소소한 운은 없는 편인지라 무엇 하나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없다. 심지어 나는 호주에 와서 카드 출금 오류, 4g 사용 불가능 등의 해프닝을 겪었고(여전히 데이터는 3g를 이용 중이다.) 한국에서 잘 사용하던 핸드폰이 호주에서는 별안간 GPS가 작동하지 않는 등 별의별 일을 다 겪곤 하였다. 그리고 그날은 나의 이런 멍청한 면모가 한층 더 올라가 도저히 스스로 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샤워할 때마다 음악을 듣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날도 역시 음악을 듣다가 냅다 핸드폰을 떨구어 물을 담그는 수준으로 핸드폰을 몽땅 적시고 말았다. 참 얄궂은 것이 막상 물에 그렇게 홀딱 젖고 나서는 곧잘 사용되다가 타롱가주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이 영영 운명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찍을 거리 많다는 호주의 유명한 동물원에서 사진 한 장을 채 찍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결국 나는 보름치 생활비를 죄다 핸드폰 수리에 쏟아야만 하는 일을 만들고야 말았다. (심지어 그 핸드폰은 800만 화소를 자랑하는 내 보급형 핸드폰을 대신하여 들고 온 카메라 특화 모델이었고, 한국에서조차 수리가 어렵다는 말에 나는 1년 내내 800만 화소로 참 많은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본의 아니게 늘 신세를 지고 마는 지안이와 하승이와 함께 서큘러 퀘이 앞에서 만나 페리를 탔다. 배를 타고 어딘가를 나가본다는 것은 고작 남이섬이 전부였던 나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눈앞에서 마주하는 오페라하우스를 보자 연신 '이쁘다'를 외쳤다. 배를 타본다는 것도 너무 신이 났고, 오랜만에 가는 동물원에 들떠있었던지라 얼마나 가슴이 콩닥대던지. 우연히 옆에 앉은 파키스탄 아저씨와 함께 어디서 왔냐며 짧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며, 그렇게 타롱가주에 입성하였다.

배를 타고 넘어간 타롱가주는 뭐랄까. 쥐라기 공원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규모에 귀여운 동물원이 그대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실제로 타롱가주는 동물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자와 호랑이 등의 맹수는 주로 볼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물들이 모여 사는 듯하였다. 한국에서는 결코 높은 펜스 없이는 둘 수 없을 거대한 펠리컨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경험과 더불어 '별안간 내가 먹히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의 낮은 펜스들은 오히려 눈 앞에 있는 저 거대한 동물이 실재하는 것인지 혹은 화면에서 튀어나온 것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꽤 생소하였다.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올 정도의 높이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넘어오지 않을 것 같은 묘한 이질감이랄까.

선선한 바람과 적당한 온도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동물원 구경을 마친 우리들은 이내 가는 길이 아쉬워 서큘러 퀘이에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사실 레스토랑에서 바라보는 서큘러 퀘이의 노을은 상상했던 것만큼이나 아름다웠고, 내가 지금 취한 것이 이 풍경인지 몇 모금 뺏어 먹은 샴페인인지 모를 만큼 눈부셨다. 역시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을 보며, 나는 아직은 조금 더 누려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괜스레 스스로 여유를 주고만 싶어 졌다. 그러니까 실컷 놀아보고 일을 구해도 된다는 S의 말이 처음으로 와 닿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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