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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보뽈로니오 Oct 03. 2017

재회, 그 직전

여덟 번째 이야기. 벨로오리존치(Belo Horizonte)

혼자 긴 배낭여행을 할 때였다. 베네수엘라에서 만나 일주일 간 함께 트래킹을 했던 다섯 명의 브라질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벨로오리존치라는 도시를 홀로 찾았다. 2014년 1월이었다. 친구들은 한 달 만에 뜬금없이 찾아온 나를 자기네들의 삶 속에 자연스레 이끌었고 덕분에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넘치게 보낼 수 있었다. 그 후로 벨로오리존치는 늘 그리운 곳이 되었다.      


슬프게도 이곳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친구들, 그리고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수많은 로컬 친구들과의 모든 경험은 강렬했고 나는 그것들을 대체로 잘 흡수했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살아온 곳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너무나도 퇴폐적인 도시였기에 그 사실이 흥분됨과 동시에 나 자신은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한국 사회가 당연히 더 편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좌절된 감정을 느꼈다. 이곳의 자유로움이 내 마음에 콕 박혔지만 이미 살아온 인생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매일은 도전, 놀라움, 쾌락, 불편함, 열등감(나는 왜 그들만큼 자유롭고 해체적이지 못한 지), 불안의 감정들이 함께 있었다.      

벨로오리존치에서의 추억. 지금까지도 내 핸드폰 프로필 배경 사진이다.


한 달 동안 ‘매일 다른 충격 경험하기’ 캠프에 다녀온 것 같았다. 친구 로베르또네 가족과 함께 주말에 방문한 로베르또의 이모는 레즈비언으로 애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로베르또의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까지 있는 앞에서 로베르또의 이모와 그녀의 애인은 진한 스킨십을 즐겼다. 10명의 친구들과 함께 사는 하파엘의 집에서 일주일 가량 지낼 땐, 바이섹슈얼을 가진 다수의 친구들이 동시에 한 집에서 서로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 연애)를 실천하는 모습을 매일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집안에서 나체로 다니는 게 편했다. 나는 가끔 구색을 맞추기 위해 비키니를 입었다. 적어도 하파엘의 집에서 이들과 일주일을 묵은 이후로 나는 남녀가 같이 쓰는 도미토리에서 속옷을 입은 채로 티셔츠나 바지를 갈아입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거리의 파티에서 만나 친해진 안나라는 언니는 그다음 날 함께 떠난 근교 여행에서 옆에 누워있던 나에게 내가 귀엽고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나는 이성애자인 것 같다고 말하자 안나 언니는 경험해보기 전엔 그 어떤 것도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거라고 내게 말했다. 또 다른 안나라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당시 20살도 되지 않았던 안나는 부모님과 다른 친척들, 그리고 자기 남자 친구와 거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거실 바로 옆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밤까지 나오지 않았다. 안나의 친척들과 부모님은 좋은 시간 보내게 놔두라며 아무렇지 않게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고 맞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서 겪은 모든 것들에 매료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벨로오리존치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그곳에 내가 산다고 생각할수록, 너무나 다른 문화를, 다른 사랑의 방식을 순식간에 받아들여야 하기에 마음에 이상한 부담감이 일었다. 이 도시를 평생 마음속에서만 그리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펐다.     


용우와 함께 벨로오리존치를 다시 찾았다. 용우와 남미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이곳이 떠올랐지만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정말로 버스를 타니 기분이 복잡했다. 2년도 채 안되어 그토록 그립던 곳에 다시 왔지만, 이제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용우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은 사람. 내 남자친구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라는 사람. 내가 이전에 경험한 이 도시의 매력을 그도 똑같이 알았으면 하지만 동시에 용우가 이들의 자유로움을 너무 동경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마음들이 일었다. 그 마음의 아주 얕은 곳엔 내가 용우와 만나기 전 이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있던 일들을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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