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이야기. 호스펫(Hospet, India)
해인은 한번 꽂히면 직진한다.
처음 보는 단어를 몇십 번 반복하고 꼭 그 단어를 써먹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 해인은 굉장했다. 한번 꽂히면 무식할 정도로 앞만 보는 성격이 참 신기했고 그렇게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어까지 가능한 해인이 멋있었다. 그렇게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은 무조건 해내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은 인도. 아파지는 몸과 줄어드는 몸무게만큼 내 이해의 도랑도 메말라 갔다. 해인은원래 여행 중 돈 관리에 철저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밤늦게 숙소에 돌아와서도 오늘 쓴 돈은 동전 하나까지 다 크로스체크하는 것이 해인의 보람이었다. 장기여행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그동안 해인의 공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여기는 인도. 가벼운 외식으로 2~3만 원이 깨질 수 없어 바게트 빵을 사 먹어야 하는 파리가 아니라 배가 고프면 50루피(800원) 샤와르마 치킨 랩을 먹으면 되는 곳이다. 해인은 사사건건 10원 한 장 쓰는 데에 민감했고 하루 예산을 초과하면 배가 고파도 굶어야 한다고 떼를 썼다.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숫자를 맞춰놨을 때야 후련해지는 스스로의 강박 때문이었다.
인도는 세상에서 가장 내 맘대로 안되는 여행지다. 시간 계획을 잡으면 기차는 연착되고, 들어갈 때 메뉴판을 보고 주문해도 돈 낼 때는 금액이 달라진다. 하루하루가 내 맘대로 안될 때 나는 그 시간을 흐름에 맡겨보려 했고, 해인은 더 세게 움켜쥐고 싶어 했다. 불안함은 해인을 점점 더 심하게 강박적으로 만들었고 그때 유일하게 확실했던 건 변함없이 옆에 있던 나였다.
어느덧 해인은 둘만의 내밀한 시간에 의미부여 이상의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
낯설고 시끄러운 호스펫에서의 밤, 해인은 사뭇 진지하게 물어왔다.
‘밤이 왔는데 왜 며칠째 나를 만지지 않아? 이제 내가 안 궁금해? 벌써 둘이서 여행한 지가 몇 주가 지났는데 나랑 같이 있는 게 이젠 더 설레지 않나 보네?’
우리의 역사상 가장 추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나에게, 우리의 역사상 가장 꾀죄죄한 해인은 섹시함을 원했고 나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게 방금까지 설사하다가 불 끄고 누운 사람한테 할 말…?’
냉랭한 분위기에 어김없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몸져누워있던 나는 애써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나는 인도에 있는 몇 달간 쬐죄죄한 해인에게 명백한 전우애를 느꼈다. 하지만 해인은 소똥을 밟고 들어와서도, 꼬이는 모기 때문에 코일형 모기향을 켜고도 왜 나에게 관심이 없는지 매일 밤 따져 물었다.
다른 건 다 흐름에 맡겼어도 바로 옆에서 화내는 사람 앞에서는 화난 감정을 숨길 수 없었고 지겹게 다투는 밤이 반복됐다. 난 아직도 그때의 내가 해인에게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강박적인 마음이 기댈 곳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