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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보뽈로니오 Mar 04. 2019

바깥은 여름

열여섯 번째 이야기. 코치(Kochi, India)

  도망치듯 떠나와 남부 케랄라 주에 도착했다. 첫 도시 콜카타에서 보낸 크리스마스가 너무나 혼란스러웠기에 얼른 도망치고 싶었다. 몰리는 인파를 피해 여유로운 곳을 찾아 이동에만 꼬박 4일이 걸렸고 정신 차려보니 슬슬 복통이 시작되었다. 서울-부산을 세 번 왕복할 거리를 무궁화호보다 느린 기차에서 설사를 하며 달려갔다.


 어느새 눈 앞의 바다가 벵골만에서 아라비아 해로 바뀌어 있었고, 한적한 어촌마을은 새해 행사를 준비하며 가볍게 들떠 있었다. 한해의 마지막 날, 음주가 엄격하게 금지되어있는 케랄라 주였지만 새해를 맞아 리큐어 샵도 활기를 찾았다. 맥주 한잔 걸치고 차분히 산책을 하던 우리 옆으로 한가족 네 명이 모두 올라탄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그렇게 한대, 두대, 열대, 스무 대..  


 그때 깨달았다.. 인도 인구가 13억이구나.. 인파를 피해 왔던 조용한 어촌마을은 간데없고 눈앞에는 다시금 상상치 못한 인파가 있었다. 코치는 케랄라의 거점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새해의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왔다. 어쨌거나 신묘한 분위기에 우리도 취했고, 새해 카니발의 볼거리에 넋을 놓고 즐겼다.


시바신. 몰려든 인파 탓에 제대로 한컷 건지기가 힘들었다.


 카운트 다운을 위해 바닷가에 설치된 큰 무대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한 인파는 낯선 이방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지나가는 해인에게 희롱하듯 휘파람을 불고 엉뚱한 말을 거는 사람들이 생길 무렵, 인파를 틈타 해인의 몸을 만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범인이 누군지 확인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인파 속에서 나는 최대한 해인을 지켜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교묘하게 몸을 더듬고 가는 이들 앞에서 해인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나도 분주했다.

"해인아 괜찮아? 어떤 새끼가 그랬냐, 한 번만 나한테 걸리면 죽여버릴 거다. 우리 해인이 속상하지, 나랑 꼭 붙어 다니자."

해인을 달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끌고 나온 나에게 해인이는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 이렇게 사람 많을 줄 모르고 왔어? 지금 내가 어떨지 생각해봤어? 너도 똑같은 놈이야."

 '너도 똑같은 놈? 내가 왜 똑같은 놈이야? 내가 왜 여길 데려와? 우린 같이 왔잖아? 내가 너를 만진 놈들이랑 똑같은 놈이라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한번 참았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해인, 많이 속상하지? 그러지 말고 조금 쉬다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우리 좀 출출할 때 됐어."

"맛있는 거? 이 와중에 맛있는 거? 너는 배가 고파? 지금 배가 고프냐고.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해인의 마음을 달래려 할 수록 해서는 안될 말만 골라서 하고 있는 듯했고, 그 시간이 한두 시간을 넘어 세 시간, 네 시간이 되어 갈 때, 나도 노력하는데 너무 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할 말이 닳고 헛바퀴가 돌 때쯤 짜증 부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한국에서 싸우기만 하던 해인과 다시 잘해보려 떠나온 그곳에서 새해부터 불안한 시작.


어딜가도 사람 뿐.


 돌아보면 나는 산불이 났는데 내 집 앞의 불만 끄고 들어가 쉬려고 한 것 같다. 내 분노와 노력은 해인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해인의 수치심은 맛있는 걸 먹고 분위기를 바꿔보는 하찮은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고, 해인의 분노는 덩달아 화내는 내 분노보다 더 까마득한 곳에 있었다.


 모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눈앞에 스노볼이 있어도 '바깥은 여름'이다. 벌어진 상황에 화나고, 미숙한 내 대처에 두 번 화난 해인에게 '나도 노력한다고 하는데 너무 화만 낸다'는 식으로 말했던 나는 얼마나 얕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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