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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샨 Aug 30. 2022

무기력과 감정

일기

출판사에 취직했다. 원하던 단행본 출판사는 아니다. 어쩌다보니 교과서를 만드는 편집자가 되었다. 전공을 살려서 취직한 격이다. 전공을 안 살리려고 돌아왔는데 그 길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경력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다. 회사에 들어와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칭찬을 자주 해주었는데(걱정과는 다르게 잘 버티고 있다) 그 중 두 분에게서 한 유튜버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제주도에서 고양이와 함께 묵묵히 부지런히 살아가는 친구였다. 호기심에 찾아봤는데 너무 예쁘고 성실한 친구여서 나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말투에서 나타나는 담담함이, 음악과 영상에서 느껴지는 감수성이 순수하고 강인해 보였다. 삶이 녹록치 않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좇으려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며칠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힘듦이 있었겠지 짐작할 뿐이다. 나 따위가 그의 내면을 알 수 없지만 그날 내내 생각해보았고, 조금 울적해졌다.


요즘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려 하는데 계속해서 잠이 온다. 집이 조그맣기 때문인가. 침대와 책상이 있는 단출한 원룸인데 내게는 과분하게 여겨지는 깔끔한 방이다! 매번 침대에서 책을 보려다 잠이 든다. 주말에도 약속이 없는 날은 오후가 되서야 일어난다. 잠을 자고 싶다. 아홉시부터 일곱시까지 잠을 자도 회사에 오면 졸리다. 아무생각 없이 계속 자고만 싶다. 익숙한 느낌. 20대 많은 시간을 이 느낌에 압도되어 살았다. 무기력은 우울과 닮아서 우울이 먼저인지 무기력이 먼저인지 알아내기 힘들다. 외로움이라는 감정 때문일거라 여겼지만 외로움을 자아내는 환경때문일지도 모르지.(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이니) 멍하니 책상을 뒤지다 몇 개월 전에 쓴 일기를 찾았다. 일기 속 나는 취업준비를 시작하고 막막함이 기본값인 하루를 살고 있었다. 친구의 취업 소식이나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에 주변에는 행복한 일로 가득한데 나만 도돌이표인 느낌에 젖어 있었다. 수십번을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자소서를 쓰려 마음 먹는 시간이 반복됐다. 성실하지는 못했다. '이런 내가 어디에 갈 수 있을까'와 같은 마음과 매일 싸우고 있었을뿐. 간절하지만 간절하지 않던 내게 우연히 기회가 주어졌고 운 좋게 붙들렸다. 더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밥벌이를 하는 지금 최악의 상태로 떨어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것은 회사와 돈이라고 생각하니까. 돈을 버는 것만으로 조금은 생에 만족하니까. 스스로를 책임지는 삶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삶이었다.


"민재가 말한 평범한 삶이란 불운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살면서 한두 개의 불운이라는 것이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거야말로 평범했다." - 소설 보다 여름 중 <포기/김지연>


최근 읽은 짦은 소설의 한 문장에 이끌렸다. 평범한 인생은 사소한 불운이 탑재된 것이라고 한다. 지난날 나는 인생을 시트콤에 비유하며 사소한 불행이 겹치는 순간 마다 특별히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이 구질구질함이, 누구에게도 말 못할 창피함이 반복되는 인생 자체가 평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누구나 겪는, 아니 적어도 내가 겪어야 하는 크고 작은 불운들의 흔적이라면 그저 받아들여야지.사실 잘 생각해보면 특별히 운이 좋았던 날들이 더 많은데도, 물을 아무리 담아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처럼 결핍의 한가운데 머무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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