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잘 다니고 있다는 글을 남기고 몇 개월 뒤에 퇴사했다. 회사에 다닌 지 8개월 동안 숱한 퇴사자를 거치고 가치관이 정반대인 단행본을 편집하며 고민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럼에도 돈을 벌어야 하기에 다니는 게 맞았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같은 팀 팀장님의 퇴사와 함께 상사들의 연이은 퇴사크리를 맞은 나는 사이코패스 같은 본부장 밑에 들어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교과서 개발을 시작하면 자그마치 3년을 일해야 한다. 걱정이 물밀듯 밀려왔고 도망치려면 지금이 제일 빨랐다.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퇴사 절차, 말을 꺼낸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인수인계까지 끝마쳤다. 알바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며칠 밤을 지새우게 했던 고민은 끝나있었다.
실은 금방 다른 회사에 철썩!하고 붙을 줄 알았다. 자신감이 치솟아 있었기에 어디든 길은 있다며 자만했다. 가장 가고 싶던 이른바 '대감집'(출판계에서 부르는 은어) 출판사의 실무진 면접을 본 후 거의 붙었다는 생각으로 최종 면접을 본 게 실수였다. 게다가 개발 전에 퇴사한 직원들을 괘씸하게 여기던 이전 회사의 대표가 이곳 저곳 전화를 돌려 자신의 회사 출신은 뽑지 말라고 했단다. 나가면 취업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협박하던 상사의 말이 떠올랐다. 어이없는 일을 당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했고 퇴사하며 생각해놓은 플랜이 바스러지는 것을 보니 어느새 나는 머릿속으로 나이는 많은데 돈은 없고 직업도, 친구도 잃은 한 인간의 브이로그를 찍고 있었다. 익숙한 불안이 엄습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은 꽉 막힌 터널 같다. 자기 전이면 숨이 안 쉬어져서 밤을 꼴딱 새웠던 기억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서 죽을 것 같던 공포가 스쳐지나갔다. 안정감이라곤 없던 저녁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변한 점이 많다. 제 때 자고 일어나는 생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나를 책임진다는 감각, 돈이 주는 위안과 일이 주는 성취감. 퇴사할 때 모든 것을 고려했지만 항상 상상보다는 현실이 더 생생했고 계획은 어그러지는 것이 평범했다. 도전해 본 적이 적으니 실패에도 면역력이 없던 나는 금방 흐믈흐믈한 상태가 되었다. 공기가 빠져버린 튜브처럼 일주일은 잠을 자는 데에만 주력했다. 그렇게 책을 보는 것도 싫어서 인스타의 파도에서 헤엄치다 한 게시물을 만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걷는 능력'
A와 B는 같은 속도로 걷고 있다.
속도가 붙어 신나게 뛰다가
둘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A는 일어날 수 없었다.
슬픔 속에 갇혀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왜냐하면 A는 첫번째로 자신에게 일어난 역경이
앞으로의 불행한 삶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예시라 믿었고
두번째로 A는 스스로 다시 일어나 뛸 수 있는 대처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A가 할 수 있는 대처는 자신을 일으켜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과
슬픔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B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걷는 능력'이 있었다.
B는 먼저 충분히 슬퍼할 수 있었다.
그러고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을 생각해봤다.
얼마 후 B는 알게됐다.
자신이 땅을 제대로 보지 않고 뛰었고
뛰는 것이 처음이라서 익숙치 않아 넘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B는 역경으로 삶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자신이 더 단단해질 것이라 믿었다.
B는 서두르지 않고 할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뛰기 시작했다.
땅을 잘 살피며 노련하게 원하는 곳을 향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걷는 능력'을 회복탄력성 혹은 적응 유연성이라고 일컫는다.
@im_buyeong 임부영 상담가 게시물 중-
만화로 된 게시물에 적힌 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 능력이라는 거 되게 자주 접한 문장 같은데 왜 가슴이 찡한지 모르겠다. 문장과 글에 힘을 얻고 몸을 일으키는 건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예전의 나라면 이겨낼 수 없다며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겠지만 오늘의 나는 일어나려고 조금씩 몸을 꼼지락대본다. 일년 넘게 상담을 받고 책을 읽고 감정을 달래려 노력하며 얻은 것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오늘을 사는 요령이다. 절망감이나 불안감이 여전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앞을 보는 거니까.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인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를 들으며 시큰거리는 마음을 위로해본다. 어느것도 확실한 것이 없기에, 예상대로 되는 삶은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