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샨 Feb 21. 2023

J

위챗을 지워서 편지할게

쥬이지에 서안을 떠난지 벌써 4년이 흘렀네. 나는 한국인이 다 됐어. 서안에 도착한 날을 기점으로 현지인처럼 중국 음식을 흡입했었는데 이제는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한달에 한 번만 마라샹궈집을 방문해. 지단빙, 미시엔, 웨이지아 량피, 황먼지. 마라샹궈 말고도 먹고 싶은 게 많아. 이것들 먹으려면 서안에 가는 방법 밖에 없다. 중국에서 돌아온지 일년쯤 되었을 때 쥬이지에의 연락을 받고 당장 비행기 티켓을 사려 했어. 방학이었고 저금한 돈을 박박 긁으면 가능했거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집에 아픈 사람이 생겨 다음으로 미뤘어.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을 줄 몰랐네. 서안은 여전히 그곳에 있는데 감염병이 지나고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생긴 것 같아. 2년 동안 사람들은 분노하고 슬퍼했지. 누군가는 그곳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고 했어. 혈육은 중국인이라고 하면 안 좋은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하더라. 무서웠어. 감염병으로 덮인 서안의 모습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꿈틀꿈틀 피어오르는 혐오라는 감정도. 일년 육개월 동안 날 보살펴준 친구들의 맑은 얼굴. 순수한 웃음이 선명한데 이 기억과 그 나라에 대한 혐오는 공존할 수 있을까. 한국에 섞이고 싶은 마음과 중국을 향한 원망감이 들다가도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 그곳을 변호하는 나를 발견해. 그곳을 떠올리면 묘한 죄책감이 들고 머리가 복잡해져 도망치곤 했지. 쥬이지에는 어떻게 지냈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궁금해. 온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가만히 듣고 싶어.

지난주 선교사님이 비자 발급을 위해 한국에 오셨어. 여전하더라. 우리에게 얼른 결혼할 남자를 찾아야 한다고 했어. 더 늦으면 혼자 남게 된다면서. 한국 남자가 중국인 여자랑 결혼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며, 한국 여자에게 결함이 있는 것 아니냐고. 요즘 이런말 하면 큰일나지? 하시며 허허. 화장을 하지 않은 친구에게, 아파보이는데, 남자친구 집에서 자고 온 것 아니냐며 허허. 거리셨지. 스물 세살엔 이런 말들에 웃으며 눈을 휘었고 저녁엔 이불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지. 종교적 판타지는 말끔히 사라졌달까. 다행히 4년이 지난 나는 달라져서 멋쩍은 웃음 대신 굳은 표정을 짓는 법을 배웠어. 하지만 좋았던 기억도 분명해서 분리하려 노력해. 흐린 눈을 하고 좋은 면을 보려 하는 게 옳은 행동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아. 홀로 버티는 건 잘하는 일이 아니고 난 여전히 겁쟁이야.

한국어로는 '지에'를 '언니'라고 하니까 그렇게 부를게. 쥬이 언니. 언니, 언니라는 말에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왠지 뭉클하고 든든하기도 하고. 있잖아 나는 언니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렸고 언어도 부족해 언니의 상황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남들과 다른 삶을 산다는 거 본인만 아는 외로움이 깊은 거잖아. 그때도 지금도 단단함, 건강함, 온전함 이런 단어들이 언니를 둘러싸기를 바라. 나는 하나님도 믿지만 언니의 용기와 사랑도 똑같이 믿어. 직접 받았고 기억하니까. 언니가 행복했으면 해. 가끔은 희생보다 지금의 안위를 챙기고 조금은 못되고 조금은 자애로운 사람으로 살았으면.

걷다가도 종종 서안 냄새를 맡아. 처음 서안에 갔을 때 유학생 언니가 말했던 서안만의 독특한 향. 라지아오와 기름 냄새가 섞인 듯한, 땀 냄새와 음식 냄새가 얽혀있는 그런 시큼하고 또 달큰한 향. 그럴리가 없는데도 진짜 맡아져. 문득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리운 향이야. 요즘은 서안이 나에게 돌파구가 아니라는 걸, 더는 그곳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이젠 한국에서 살아내보고 싶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이라 받아들이려 해. 단지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있어. 뜨거운 태양 아래 전동차를 끌고 학교에 갔던 서안의 여름, 예배 전 친구들과 왕창 자른 수박을 나눠 먹으며 어설픈 중국어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순간, 따뜻했던 서안에 폭설이 내리던 날 창밖을 보며 유학생 친구와 서로의 서투름을 고백했던 밤. 한층 더 그 장소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구구절절한 사랑 고백 글이 되어버렸지만 위챗을 삭제해서 편지를 보내. 조금 늦었지만 춥지 않은 겨울에 찾아갈게. 그때까지 건강하길. 평안이 언니의 삶에 가득하길 기도해. 유선.


매거진의 이전글 그럼에도 걷는 능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