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재작년 내겐 직장이 없었고 집에서 책을 읽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루에 한 권을 목표로 침대에서, 책상에서, 도서관에서 절반은 꾸벅꾸벅 졸면서 일단 다독을 목표로 책을 읽었다. 취향이 정반대인 엄마의 서가에 꽂힌 책부터(그녀의 최애 작가는 김진명이다) 연재노동자 이슬아의 에세이, 문학계 아이돌 정세랑의 소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서적을 뒤지며 울다가 웃다가. 울적한 기분을 떨치고 싶으면 침대 맡에 손을 뻗었다. 남아도는 시간 유튜브에 '책 추천'을 검색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자연스럽게 편집자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참 희한하게도 전혀 관련 없는 직종의 면접을 준비할 때도 편집자라는 단어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불합격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몸과 마음에 각인되던 나날.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왕 나쁜 거 재밌는 걸 해보자 싶었다. 세상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편집자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돈도 벌고 싶었다. 백수에서 지망생이 되었다. 지망생이라는 타이틀은 침대 위에서 나를 일으켜준 주문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직업과 나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편집자의 기본 소양은 글쓰기 실력이라는 말을 들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기본적인 능력. 난 글을 써 본 적이 없는데. 깊게 생각하면 우울하니까 일단 해 보자. 저스트 두 잇. 남는 건 시간이다. 마침 친구 집 근처에 독립책방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글쓰기 모임도 한다네. 최선의 용기를 냈다. 덕분에 설렘과 두려움을 품고 한 자 한 자 글을 써 갔다. 사 개월 동안 마음이음 책방에서 옥미님과 글 동료를 만났고 동시에 후란서가라는 독립서적 작가님께 글을 배웠다. 떠듬떠듬 다른 글의 부분을 모방하며 내면을 드러내다 보니 기록이 되었다. 고맙게도 내가 배운 글쓰기엔 따뜻함이 흘러넘쳤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됐으니까. 노트북, 그리고 용기와 성실함이 있다면 문제없었다. 글쓰기는 머릿속이 복잡하고 예민한 사람에게 더없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분을 받아들일 여유가 사라졌다. 일주일에 한 번도 겨우 쓰는 일기 같은 글이 무슨 쓸모가 있나, 이런 글을 쓰는 시간이 편집자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난 내일 당장 자소서를 내야 하는데. 사적인 글과 편집자라는 꿈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본격적으로 편집자를 준비하며 학원에 가고 서류를 넣으며 글쓰기는 뒷전이 되었다. 지금은 글쓰기 실력으로 붙은 것 같지는 않은 한 교과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왜 단행본 편집을 하지 않냐는 물음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넘길 뿐이다. 6개월 동안 한 군데도 연락이 안 왔는걸요. 전 먹고사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더라고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아직,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이상하게 글쓰기를 향한 욕구가 꿈틀꿈틀 올라왔다. 뭔가 아쉬웠다. 뭐라도 써야지 인생이 정리될 것 같았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아 글을 써야 된다는 압박감만 계속될 무렵, 마음이음으로 돌아왔다. 두 달 차 글쓰기 모임. 점점 더 글이 쓰고 싶다.
글쓰기는 한 번도 구원이 된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원고지 양을 늘리기 위해 접속사를 남발했고 대학생 때도 작문 과제를 제출하거나 논술 시험을 보면 죄다 마이너스였다. 글은 내게 부끄러움이자 열등감이었다. 누군가는, 매일 다른 사람의 글을 보다 보면 자기 글을 쓰고 싶다던데 너는 그렇지 않으냐고.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으냐 묻는다.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경지에 다다르고 싶거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책을 내고 싶은 마음도, 모두에게 읽히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그런 내가 글쓰기를 지속하고 있다. 무엇이 글을 쓰게 한 걸까? 편집자가 되고 싶어 시작한 글쓰기가 '내 글'이 된 이유는 무엇이 되기 위한 글쓰기보다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한 글쓰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해서. 휩쓸리지 않기 위해 글쓰기가 필요했다. 희미한 내가 글을 쓸수록 확실해진다. 비로소 진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 여전히 남의 글을 만지고 다듬고 싶지만 일단은 내 글을 먼저 편집한다. 이런 책 저런 책을 만들고 싶다 골똘히 생각하다가도 내 글을 정갈하게 만들어 내보이기로 한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겐 글쓰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