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두고 말 못 하는 사람
“외로움은 먼지 같은 거야. 본인도 모르게 스며들고 쌓이거든”
중국에 있을 때 선교사님이 자주 하시던 말이다. 이민자의 외로움은 뚜렷이 나타나진 않지만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1년이든, 10년이든 몇 년을 살아도 똑같다고. 타지에서 살면서 느끼는 감정이 외로움이라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쌓이는 감정은 뭘까. 나는 꼭 숨겨 놓는다. 먼지 같은 마음을 털지 못하고 1년이고 10년이고 묻어두고 산다.
담고 사는 성격이 싫다. 끙끙대다 결국 폭발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다. 쿨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부럽다. 넌 왜 그렇게 예민해? 이 말을 듣기가 싫어 차곡차곡 눌러두고 날카로운 말투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상대방은 시한폭탄을 맞은 기분으로 나를 쳐다본다. 우정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 그렇게 혼자 오해하면서 친구들이랑은 어떻게 지내냐?”
언니는 나랑은 반대의 인간이다. 돌려 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나도 아는데, 아는데 안 되는 거야 네가 내 맘을 알아?’ 따지고 싶지만 고쳐야 하는 사람은 나니까 숙연해진다.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진리는 타인은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을 본인도 모르게 내뿜을 때가 있다. 예민하고 상처 받는 부위도 보여주지 않으면 약을 발라줄 수가 없다. 말하지 않으면 상처가 짙어진다. 흉터로 남던지 고름을 짜주지 않으면 커지는 여드름같이 될 것이다. 빵 터져서 우리의 관계는 지저분해지겠지.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도 난 네 말투가 상처였어”
결국엔 못 참고 말하게 되면 눈물을 질질 짜며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을 토로한다.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네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미안하지만 난 그런 의미로 애기한 게 아니야. 그런데 나도 이러이러해서 서운했어’ 훌쩍이던 코를 진정시키고 상대방의 말을 듣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배려의 결이 어긋났다는 걸 깨닫는다.
타인을 믿는 마음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난 신뢰가 어렵다. 불만이나 서운함을 털어놓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다. 관계는 항상 위태롭고, 언제 끝날지 모르며 벼랑 끝에 서 있는 거와 같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어도 끝을 예감했다. 지금은 우리가 손을 잡고 서 있지만 언젠가 다른 길을 걸어갈 테고, 나는 너에게 실망을 안겨주겠지. 두려운 마음은 실제보다 커지고 부풀어 올랐다. 너와 나는 가상의 장막에 가려져 서로를 보기 어려워졌다.
막상 대화를 나누면 후련하다. 해결 가능한 상처였다며 웃으며 이야기한다. 하지만 끝을 정해두는 습관은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속삭인다. 이제까지 함께 있어준 사람의 말이나 믿음보단 언제든 포기해도 된다는 가벼운 말에 현혹된다. 언제든 손을 놓을 준비가 된 사람은 나다.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공감에 관해 쓴 ‘당신은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이라는 책에서 하시디즘 철학자이자 이야기꾼인 마르틴 부버의 이론이 나온다. ‘나와 너 관계' 이론이다.
“‘나-너’라는 기본 단어는 온전한 존재들만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동인(動人)이 된다면 우리가 온전한 존재로 집중 및 융합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편으로 그 일은 나 없인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너'와의 관계를 통해 내가 되며, '나'가 됨으로써 '너'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불가능해 보이지만 나를 알기 위해 너를, 너를 알면서 나를 알아가는 관계가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관계가 없다면 내밀한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것이다. 믿는 일은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해하기만 한 관계가 어디 있을까.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과 상대방을 공감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믿을까 말까 할 때는 그냥 믿으세요. 고민하는 시간이 더 힘들어요’
팟캐스트를 듣다가 지나친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상대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어디까지 내어줘야 상처 받지 않을지 계산하는 시간 동안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후회 없이 사랑을 주고 싶다. 서툰 말투도 날이 선 표정도 둥글어지는 때가 오기를, 남아있는 마음 때문에 후회하지 않기를. 먼지로 느껴졌던 감정들도 훌훌 털어내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