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샨 Jun 17. 2021

불행과 행복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졸업전시를 앞둔 해였다. 그 해 내내 죽고 싶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앞으로 가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전시가 끝나길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끝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 심정이었고 막연한 절망감은 그동안 겪은 우울과는 달랐다.


전시 준비를 끝내고 가족과 바다로 떠났다.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아도 무작정 떠나고 나면 발견하는 것이 있다. 바다를 보며 떠올렸다.

나 죽고 싶지 않구나.

  


단순히 행복을 느끼는 사람보다는 쉽게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다. 불행의 이유를 붙이고 근거를 나열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불행에 빠져있으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 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럼에도 행복한 일은 수도 없이 찾아왔다. 책을 읽는 순간에 왔고, 맛있는 음식을 걱정하지 않고 먹을 때 왔고,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왔다. 소소하고 작은 기적들이 삶을 이루었다. 물질에 의지하고 감성적인 음악이나 그림, 와닿은 문장에, 달리는 순간 차오르는 기쁨 같은 것들로 나를 형성했지만 이번에 하고 싶은 말은 사람에게 받은 구원이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사람은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라는 대사가 나온다. 드라마를 볼 무렵 사람은 기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행운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말이 마음 깊이 남았다. 믿고 싶은 마음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올봄, 단발로 내려온 머리를 반으로 묶고 나들이를 갔다. 다녀오는 길에 엄마를 마주쳤는데 내 뒷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이게 뭐야?”하고 놀라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핸드폰 안에는 손가락 마디만 한 생살이 수북한 머리카락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자가면역질환’ 이라며 여유를 가지고 치료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 언니는 서울에 가면 머리가 빠진 여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는 말로 위로했다. 이 나이에 원형탈모라니. 하루를 울컥하여 베개를 적셨지만 언젠가 낫겠지 싶어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두 번째 탈모가 생겼을 때는 솔직히 당황했다. 전두 탈모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사람도 있던데, 한번 걸리면 만성화가 된다던데.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하지만 탈모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졌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불행을 피할 방법은 없다. 이유도 모른 채 늪에 빠지는 사람이 있듯이 불행은 조용히 스며들어 폭풍 같은 밤을 맞게 하는 것이다.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던 시절,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이가 없다 생각한 날이 있었다.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연락을 피했다. 결국 만나게 되는 날에는 속을 보여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과 없이 사람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왜 슬픈지 왜 알아주었으면 좋겠는지. 구구절절 떠들다 보면 후련해지는 것이다. 말하고 나면 인생이 좀 가벼워졌다. 우울이 나온 자리는 각자 다르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 곁에 머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보잘것없어서, 한심해서 나조차 멀리할 때에도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덕분에 오늘을 살 수 있었다. 사소해 보이지만 그건 분명 행복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머리가 빠진 부위에 약을 바르고 있다. 뒤쪽이라 보이지 않아 겨우 찾아 바른다. 거짓말이다. 남의 손을 빌리고 있다. 스스로 바르라면 바를 수 있지만 왠지 처량한 기분이 되어, 타인의 손길을 빌리고 엄살을 떨고 있다. “약 발라줄게”라는 간단한 말에 묻어나는 사랑을 느낀다. 피할 수 없는 불행이라도 함께해줄 이가 있다면 견딜 수 있다. 뒤에 생긴 탈모는 이제 많이도 자라 찾기가 어렵다. 어젯밤도 습관처럼 약을 바르며 생각했다. 이게 행복인가? 하고.

매거진의 이전글 중국과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