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째 강연을 준비하면서 느낀, 자기서사와 연습의 법칙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표현이 있다. 오춘기, 혹은 때늦은 사춘기.
사춘기(思春期)를 직역해보면 '생각이 봄처럼 시작한다' 혹은 '봄을 생각하는 시절'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제 막 피어나는 13~17세 언저리의 시기를 사춘기라 부른다.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사랑에 눈을 뜨고,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나이대다. 그래서 사춘기인데, 신기하게도 우리 인생에 사춘기는 학창시절에 마무리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춘기가 힘든 이유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바운더리(경계선)은 점점 또렷해지는 데 비해 정확히 내 알맹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내리긴 어렵다. 또래집단을 포함한 주변의 영향에 휘둘리고, 그러면서도 부모님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고 싶고. 무어라 형언할 수 없지만 무언가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기미가 보인다. 그래서 괴로울 타이밍이다. 몸만큼이나 마음이, 나 자신과의 관계가, 사회적 자아가 발생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지났다고 그리 달라지진 않는다. 우스개소리로 오춘기를 넘어 육춘기를 겪고 있다고 넋두리를 한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미래에 정해진 바는 없고, 이제는 마음을 정했다고 여겼던 선택도 세월을 따라 거듭 번복해야 한다. 내 알맹이인 줄 알았던 것이 알고 보니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세월을 보내다가 지나온 궤적을 돌이켜 통째로 허무해지곤 한다.
어째서 사춘기는 지나가지 않는 걸까. 재밌게도 3년째 강연을 준비하며 내 나름의 진맥을 해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일생은 너무 긴데 '자기서사'의 필요성은 간과하기 때문이다.
2020년 무렵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 가르치는(Teaching) 자리에 섰을 때, 나는 자격 미달이었다. 적어도 내가 특정 분야의 대가라서, 혹은 어떤 지식을 전할 만큼 준비돼 있어서 강연 자리에 섰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남들이 해보지 않은 경험을 일찍 했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럼에도 냉큼 제안을 수락했다. 나는 그 기회가 꽤 쓸모 있다고 내다봤다.
순서가 반대라고 이해해보면 어떨까. 모든 것에 통달해서,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서 연단에 설 수도 있지만 자리가 주어졌기 때문에 기를 쓰고 준비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나는 확실히 후자였다. 권위자가 아닐 뿐, 할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틱톡을 비롯한 숏폼 트렌드, 뉴미디어 콘텐츠 제작 현장에 몸 담고 있으니. 감사하게도 무언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면 그걸 목표로 그간의 경험을 '지식'으로 정리해봄직 하다.
더군다나 강연은 하면 할수록 는다. 처음에는 머리 속에서 60%쯤 정립된 이야기를 (대담하게) 꺼냈다면 회를 거듭해 그 내용을 수정했다. 그러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얼버무렸거나 다 헤아리지 못 했던 지점에 대해 '아하!' 모먼트가 찾아왔다. 내가 익혔던 내용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화했다. 남에게 설명해야만 하는, 내가 틀릴 수도 있는 위험(리스크)에 노출될 때라야 강연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정교해졌다.
예를 들어보자. 맨처음 뉴미디어에 대해 소개할 때는 주로 내가 겪어본 일에 국한했다. 내가 어느 언론사에 취직해서 어떤 한계를 마주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어떤 여정을 거쳐왔는지 개인적인 서사를 스토리텔링의 실마리로 택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느꼈다, 저렇게 보았다, 앞으로 이렇다더라 하는 첨언을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보태 뉴미디어 트렌드와 기법에 대해 전달했으니 나름 흥미를 돋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이야기만으로 매번 강연을 반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뉴미디어, 혹은 디지털 콘텐츠라는 강연 주제에 관한 내 나름의 세계관이 있을 때 더 풍성한 스토리텔링, 다각적인 정보 전달이 가능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길 원했다. 확실히 강연은 내가 정립하지 못한 관점을 정립하는 연습이 됐다. 강연료를 받으면서 내 관점을 갈고 닦는 트레이닝까지 할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딨을까!
강연 2~3년차에 접어들면서 점차 내 알맹이를 연마했다. 내 개인 서사로 풀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만, 내 알맹이를 좀 더 꽉 채우려면 시야를 넓혀야 했다. 본래 다루던 주제를 여러 다른 키워드와 붙이기 시작했다. 커뮤니티를 핵심 키워드로 설정해서 뉴미디어 논의를 이어가기도 했고, 디지털 콘텐츠 지형도를 조망하는 자료를 인용하기도 했다. 혹은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포문을 열었다.
"여러분은 맛집을 찾을 때 어떻게 하시나요?"
가장 재미있게 접목했던 키워드는, 뉴미디어 트렌드와 메타버스를 조합해서 설명했을 때다. 젊은 세대의 미디어 경험에 대해 책 원고를 준비하면서 메타버스 관련 자료를 다양하게 섭렵할 수 있었고, 이를 강연과 연결짓는 연습을 했다. 남들이 메타버스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하는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그것의 핵심을 규정하고, 그게 뉴미디어 트렌드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얼개를 짜는 연습이었다.
(TMI. 책 원고는 언제쯤 수정해서 완성할 수 있을까. 개인 포스팅을 작성하는 것과 기사를 쓰는 것과 강연을 준비하는 것과는 또 다른 영역의 일이다. 언젠가 책 쓰기에 대한 소회를 글로 남겨보려 한다.)
어쩌다 보니 여러 해 강연자로 섰다. 뉴미디어라는 화두로 꾸준히 내용을 채웠다. 그러면서 해당 주제에 대해서 더 밝히 알게 됐다. 무엇보다 어떻게 스토리를 풀어내야 청자의 집중력을 얻을지 요리조리 연구해볼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처럼 남에게 내가 아는 것을 설명하고,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부딪쳤던 과정이 그 주제에 대한 세계관을 탄탄하게 만들어줬다. 명료하고 재밌게 전달하며 서사가 쌓이는 선순환이었다.
(TMI. 이 자리를 빌어 강연자로 섭외해주신 모든 손길에 감사의 인사를... 전문 강연자가 아님에도 잊힐 때쯤 쓰임 받는다는 게 근사한 경험이라는 걸 새삼 되새긴다. 내가 전하는 서사의 리텐션을 높이자!)
'학습 피라미드'는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응용행동과학연구소(NTL)에서 발표한 프레임워크다. 24시간동안 다양한 형태로 공부했을 때 외부 정보를 두뇌에 기억하는 효율을 학습 활동별로 정리한 내용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학습은 일방향에서 쌍방향이 될수록 그 효과가 높아진다. 수업을 듣던 청자가 교습 내용을 시연하고, 토의하고, 직접 연습하고, 종국에는 남에게 가르치며 역으로 학습에 깊게 연관되는 식이다.
그래서 자기소개서는 어렵다. 남들이 내가 어떠하다,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을 가만히 듣는 건 (비록 수동적이더라도) 편하다. 그러다가 내가 나를 들여다 보고, 나의 알맹이로 추정되는 것들을 시연해보고, 남들과 이에 관해 토의하고 반복해서 연습할 때 나도 나를 '학습'한다. 자기소개서는 화면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나를 시연하는 시도이고, 제대로 설득하기 위해 나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는 행위에 속한다.
물론 함정이 숨어있다. 자기소개서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내세우는 측면이 강하다. 입시 원서라면 그 대학에서 원하는, 내가 지망한 학과에 맞춰 나의 일부를 고른다. 회사 이력서라면 내가 목표로 세운 바를 이루기 위해 거기에 적합한 자기서사의 조각들을 그러모은다. 그게 우리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다들 알고 있으리라.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 그래야만 살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한 글쓰기'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편이다. 강연을 매일 할 순 없다. 내 관점의 서사를 연단하는 좋은 기회긴 하지만, 계기를 마련하기 쉽지 않다. 모두에게 강연이라는 포맷이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부담을 덜면서도 내가 나를 끊임없이 학습할 수 있는, 가장 가성비 좋은 포맷이 글쓰기라고 본다. 아무리 영상이 짧아진다 해도 글쓰기보다 저렴하긴 어렵다. 심지어 영상은 글쓰기에서 비롯된다.
오랜만에 개인적인 글쓰기를 재개하는 이유도 위와 같다. 내가 나를 잃을 때마다 글쓰기는 나를 지탱해줬다. 20대 초반, 사춘기를 거칠 겨를이 없었던 10대를 지나 이제야 사춘기의 홍역을 앓던 시기에 (특히 나 자신을 회고하는) 글쓰기는 자신의 결핍과 욕망과 의사결정 기준을 이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걸 거름 삼아 10년 넘게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다. 내가 나를 알아가며 나 자신에 대해 가르친 덕분이었다.
그렇게 30대 초반에 이른 지금, 다시금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글쓰기로 눈을 돌린다. 20대 초반에는 나의 봄을 되새김질 하는 기록을 썼다. 30대에는 10년 만에 맞이한 새로운 봄을 어떻게 의미있게 보낼지 고민한다. 그런 차원에서 10년간 내가 했던 선택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내가 놓치고 있었던 조각들을 파악하고 싶다. 내가 그동안 나의 알맹이로 붙잡고 있던 것들을 검토해보기 좋은 분기점에 와있다.
내가 나를 나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속으로 궁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글로 꺼내어 놓을 때 자기서사를 연습할 수 있다. 남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덩달아 나도 나 자신에 대해 학습하는 효과를 얻는 셈이다. 한 두번에 그쳐선 안 된다. 같은 내용을 울궈먹어선 보람이 없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영 마뜩찮은 글도 일단 써보고. 그러면서 내가 내 알맹이를 재정립할 때 비로소 오춘기를 무사히 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래저래 자기서사를 쌓기는 험난하다. 나이 먹을수록 자기서사를 꺼내볼 기회가 줄어든다. 세상 천지에 '남의 서사'가 넘쳐난다. 자칫 그게 나의 서사로 둔갑하곤 한다. 현대 사회는 (철학자 라캉의 말마따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한다는데, 그래서 혹자는 작금의 세태를 "욕망의 획일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래서야 사춘기를 벗어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알맹이 없이 다른 알맹이에 휘둘리는 질풍노도에 빠진다.
허나 (언제나 작용에 반작용이 따르듯) 부단히 자기서사를 쌓아가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루틴, 회고 문화, 마음관리, 명상 등 속도전을 벌이는 트렌드와 노선을 달리 하려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평균 수명이 80세를 웃도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평균 수명 100세를 넘보는 연구 결과들도 나온다. 정신은 더 없어지고, 수명은 더 길어지고. 이모작, 삼모작을 논하는 만큼 '검토'의 빈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오춘기는 퍽 미래지향적인 표현이다. 생물학적으로 찾아오는 사춘기만으로 여생을 결정지을 수 없는 법. 그러니 개인의 역사를 쓰는 일, 거듭해서 쓰는 일, 수정해가며 해상도를 높이는 일은 중요해질 것이다. 결국 써야 는다. 이왕이면 이야기를 꺼내야 세계관이 발전한다. 스토리텔링까지 고려할 때 학습 효과는 배가 된다. 3년간의 강연 자료를 훑으며 앞으로 다가올 N춘기를 성실하게 맞이해야지 싶었다.
자기서사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라도 자주 글을 써야겠다. (귀찮음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