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이들의 화면'이라는 주제로 책을 썼는가
“대체 작가 님은 무엇을 보았길래 화면을 긍정하게 된 걸까요?”
사회과학 책을 쓴다는 것은 단지 기사를 쓰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물론 생방송에서 “아이들의 화면에 관심을 가진 계기”를 간단히 언급해뒀다. 틱톡 같은 숏폼 영상을 만들어 공동창업까지 맛본 이후로 그 화면 속에서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온라인 디폴트의 세상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아이들의 입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며 나의 편견을 재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아, 나름 화면을 긍정하며 산다고 어렴풋이 여겨왔음에도 나는 ‘기성 세대’에 가까워져 있었다.
원래 이 책은 IT 서적처럼 쓰여졌다.
시간은 내 평생의 화두라고 칭해도 좋을 만큼 핵심적인 사안이다.
‘시간’은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에서 연구의 대상이다. 시간의 체계는 곧 역학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If you're not paying for the product, then you are the product"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네가 곧 상품이 된다.)
어쩌면 나의 시간을 가장 홀대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아닐까.
‘아이들의 화면’에 주목했던 이유는 결국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의 주인”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다만 “시간의 주권”이 내게 없을 때 화면의 문제가 불거진다.
물론, 당연히 당장 내일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매일, 매 순간을 살 순 없다. (그래봤는데 못 할 짓이다.) 다만 종종 내게 주어진 길지 않은 삶에 간간이 몰입하는 나만의 이유, 시발점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의미다.
스토리텔링을 내 업의 본질 중 하나로 손꼽는 맥락 또한 비슷하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은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 <꿈, 견디기 힘든>, 황동규
*다음 글에서는 어째서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전념하는지, 개인적인 동인에 관해 되짚어보려 한다. 기실 이 책을 준비하며 가장 나를 괴롭혔던 자기검열은 ‘이해해보자고 말하는 것의 무력함’이었다. 말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는커녕 밥이 돼 주지도 못할 때가 많다. 이해는 ‘그런가 보다’라는 미명 하에 없던 일만 못 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끝끝내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가. 그 정념에 대해 정리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