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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Mar 19. 2024

CBS 라디오 초대석 못 다한 이야기

나는 왜 '아이들의 화면'이라는 주제로 책을 썼는가

17일 저녁, 목동에 있는 CBS에 방문했다.


라디오 게스트로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무려 전문가 초대석이었다. 지난 2월 말에 책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출간하고 처음으로 오프라인에 저자로 참석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떨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 사전 질문지를 받고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인터뷰해왔는데, 직접 라디오 작가로도 일했는데 그 반대의 입장이 되니 새삼스러웠다.


“대체 작가 님은 무엇을 보았길래 화면을 긍정하게 된 걸까요?”


질문지에 담긴 모종의 날카로움. 그 이유는 현장에 와서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20~30분가량 대담하게 될 라디오 프로그램은 시사교양 프로였다.


내 앞 순서에서는 다른 매체 기자 분이 전문가로 등판해 4월 총선과 양당의 공천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다뤘다. 즉, 나 또한 시사교양을 맡은 한 명의 전문가로 그 의자에 앉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쉽지 않은 면류관이었다. 책을 쓰는 내내 나를 멈칫 멈칫 주저하게 했던, 바로 그 무거움이었다.  


목동 CBS라니... 오랜만!


사회과학 책을 쓴다는 것은 단지 기사를 쓰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말 그대로 사회에 대해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며 글을 쓰는 도전이었는데, 여기에는 ‘내 생각’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그게 참 어려웠다. 기자라는 직업이 기묘한 탓이었다.


기자는 소위 ‘야마’를 잡고 그 방향성에 맞춰 기사를 쓰지만 결코 편향돼선 안 되는 위치를 요구 받는다. 그러므로 타인의 입을 빌려 사회를 바라보고 진단하는, 특이한 위치에 있다. ‘나의 생각’을 글에서 드러낸다니. 당치 않을 소리였다. 그러나 사회과학 책은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기어코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하는 과업을 내게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적지 않은 시간(1~2년간) 원고를 쓰다 고치기를, 사실 전혀 쓰지 못 하고 빈 화면을 보길 반복했다. 두려웠다. 내 생각을 드러낸다는 게, 그 밑천을 무모하게 주장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내게 그래야 할 용단도, 욕망도, 경험이나 이해득실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썼기에 라디오에서는 도전장 같은 질문들을 받았다.


요즘 아이들이 스마트폰과 온라인, 게임에 중독돼 망가지는 게 아닌지 불안하다는 여론을 대변해 라디오는 “왜 애써 그렇게” 아이들의 화면을 들여다 봤는지 물었다. (예상대로) 라디오 청취자들의 성토대회가 댓글을 수놓았다. 화면을 붙잡고 사는 자녀와 벌였던 실랑이, 신경전, 궁극적으로 어떻게 최선을 길어 올릴지 고민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 화면을) 가득 채워 일렁였다.


물론 생방송에서 “아이들의 화면에 관심을 가진 계기”를 간단히 언급해뒀다. 틱톡 같은 숏폼 영상을 만들어 공동창업까지 맛본 이후로 그 화면 속에서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온라인 디폴트의 세상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아이들의 입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며 나의 편견을 재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아, 나름 화면을 긍정하며 산다고 어렴풋이 여겨왔음에도 나는 ‘기성 세대’에 가까워져 있었다.  


블록체인 출입을 주로 하던 시절의 모습. 벌써 6년 전...?!


원래 이 책은 IT 서적처럼 쓰여졌다.

정확히는, ‘메타버스’를 주제로 초고를 작성했다.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한물 갔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주제로 쓰고 싶었다. 그 키워드가 모두 불타 재로 남아버렸을 때 거기서 다시 싹이 나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요지는 하나다. 메타버스는 단지 3D 아바타의 사용 여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메타버스는 얼마나 우리가 화면에 시간을 쓰는지, 화면이 시간을 빨아들이는지의 영역이다.


시간은 내 평생의 화두라고 칭해도 좋을 만큼 핵심적인 사안이다.

시간은 한정돼 있다. 소위 ‘유한 자원’이라고 불린다. 아무리 인간이 기술을 써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쓴다 해도, 타인에게 시간의 짐을 나눠 지운다 해도 시간은 흐른다. 오로지 변화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처럼 시간은 아무도 주워담지 못 한다.


그 끝에 죽음이 있다.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시간을 쓰는 일직선 위에 놓여있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했던 이 개념이 여러 사람의 죽음을 통해 현실로 다가오면서 ‘시간의 사용’은 내게 중요한 주제가 됐다.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아침에 해가 뜨면 덩달아 눈을 뜨고, 밤이 오면 스르륵 눈을 감으며 시간이 흐르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간표’가 존재한다. 시간이 무상하게 지나가는 것과 별개로 우리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훈련받는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과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별개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타이밍과 스케줄에 맞춰 살아간다. 자신의 시간을 소모한다. 점심시간부터 정해진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다 같이 밥을 먹는 시간이 그 시간으로 설정된다. 이후 학교에서 급식시간이 할당된다. 사회에 나가 특정 조직에 속하면 거기의 룰을 따른다.


마치 중세시대 교회에서 종을 울리며 노동 시간과 식사 시간을 규정했던 것처럼 시간은 (전혀 쪼갤 수 없음에도) 일과표에 따라 분절된다. 1년, 12개월, 사계절 등의 기준에 따라 우리는 엇비슷한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자신의 몫이었던 시간을 무언가와 맞교환하며 산다.


‘시간’은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에서 연구의 대상이다. 시간의 체계는 곧 역학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주 6일제에서 주 5일제로 넘어갔을 때, 야근이나 주말 근무에 대한 수당을 정할 때 그걸 합의해 결정하는 줄다리기가 치열하다. 자유롭게 일하는 것과 퇴근 없이 일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육아의 기쁨은 종종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는 ‘비정규적인’ 노동을 여성이 선택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동반한다. 여러모로 시간은 꽤나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주은선&김영미, 「사회적 시간체제의 재구축 : 노동세계와 생활세계의 변화를 위하여」, 비판사회정책, 2012. no.34.


시간에 관해 이다지도 구구절절 설명하는 이유는, 결국 화면에서 내가 시간을 쓰는 방식 또한 다분히 사회적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IT 업계에는 ‘무언가 공짜로 쓰고 있다면 당신이 곧 돈벌이 수단’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If you're not paying for the product, then you are the product"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네가 곧 상품이 된다.)


농담이라고 치부하기엔 꽤나 진실하다. 일반 포스팅 3개마다 1개의 광고 포스팅을 접하게 되는 것처럼, 혹은 나의 인적사항과 행동 패턴이 데이터로 남아 (본의 아니게) 내게 무언가 판매하고 싶은 사람과 짝을 맺게 되는 것처럼 이제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구가 됐다. 당장 비용을 지불하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지갑을 열게 되는 환경에 젖어드는 셈이다.  


그래서 시간은 돈이 된다. 노동시간이 고용주와의 계약 관계에서 주요 안건이였다면, 당신이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도 그 시간은 ‘잠재적 화폐’로 통용되곤 한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 누적 다운로드수나 유저 평균 체류시간을 주요 지표로 내세우는 이유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지갑을 열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수중에 이만큼 많다는 걸 자랑하는 게 아니겠나. 넷플릭스가 게임 포트나이트를 ‘시간 쟁탈전’의 라이벌로 삼은 2019년이 어색하지 않다.


그러니 당신의 시간은 당신보다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고용주가 당신으로부터 얻은 시간을 최대한 생산적으로 쓰기 위해 골몰하는 것과 같이 화면 속에서도 당신의 시간을 최대한 생산적으로 쓰려는 전략과 전술이 교차한다. 그렇게 성장의 기회와 생산의 극대화를 통해 자본주의는 유지된다. 그 공고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비노동 시간조차 성실하게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나의 시간을 가장 홀대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아닐까.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


‘아이들의 화면’에 주목했던 이유는 결국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의 주인”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화면이 시간을 빼앗아 낭비하는 ‘악의 축’은 아니다. 화면이 성장의 기회와 생산의 극대화를 이끌어낸다면 그걸 취하는 쪽이 분명 존재한다. 누군가는 본인이 원하는 성장의 기회를 화면을 통해 발굴할 수도 있다. 화면 바깥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도전을 통해 또 다른 자아를 찾아 실현하는 케이스도 적지 않다. 반드시 ‘돈벌이’의 유무가 아니다. 나다움을 찾는 계기를, 연결의 의외성과 수월함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화면은 도구가 될 수 있다.


다만 “시간의 주권”이 내게 없을 때 화면의 문제가 불거진다.

왜 나는 지금 이 화면을 붙들고 있는가, 왜 거기서 하루에 (많게는) 8시간까지 보내는가. 내 나름의 왜(WHY)가 부재하다면 반대로 누군가의 왜(WHY)에 당신이 복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금, 시간은 돈이 되니까. 당신의 화면, 당신의 시간을 통해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의도가 세상 천지에 넘실댄다. 나의 시간이 얼떨결에 타인의 이유를 충족하는 구조가 성립될 따름이다.


(라디오 초대석에서 다 말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의 화면에 ‘왜?’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자주 던지는 것은 곧 시간의 쓰임새에 대한 문제 제기와 연결돼 있다고 믿는다. 당신은 왜 시간을 지금과 같이 쓰고 있는가. 그 질문에 아이들이 어떤 답을 내놓는지 (좀 더 인내심을 갖고) 경청할 수 있다면 문제의 정의, 의미의 재구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책에서 설명한 바) “왜”라는 물음표, 주체성이 효능감을 키운다. 몰입과 중독의 한 끗 차이를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희비극이 아니겠나. 내 삶이지만 그 시간을 ‘자기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모순. 그렇지 않는다면 내 시간은 타인의 의도로 디자인된다는 사실이 다시금 오늘 하루, 최근 한 달, 이번 분기와 지난 해를 돌아보게 한다.


물론, 당연히 당장 내일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매일, 매 순간을 살 순 없다. (그래봤는데 못 할 짓이다.) 다만 종종 내게 주어진 길지 않은 삶에 간간이 몰입하는 나만의 이유, 시발점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의미다.


스티브 잡스는 30년 전에 '마음의 자전거'를 주창했다지.


스토리텔링을 내 업의 본질 중 하나로 손꼽는 맥락 또한 비슷하다.

내 입으로 내 인생의 서사를 내뱉을 수 있는가. 이유의 퍼즐을 맞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즉, 나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받아들이며 설득하고, 세상이 점차 변화하는 데 이야기가 큰 역할을 한다고 본다. 내 시간을 내가 어떻게 쓰는지, 그 기준과 역사에 대해 바로 알고 있다면 앞으로 그 사람의 미래가 (확정돼 있지 않더라도) 무사히 기록되리라 예측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가 꼭 ‘진실’과 맞닿아 있는 건 아니다. 스토리텔링은 삶의 진리와 이면을 드러내 나를 각성시킬 수도 있지만, 거짓 모래성을 쌓는 데 일조할 수도 있다. 내 것인 줄 알았던 삶이 사실 타인의 욕망에 부역하는 거짓이었다면, 나는 ‘(남의) 소설 쓰고 있네’라는 핀잔을 참을 수 있을까 아득해진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은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 <꿈, 견디기 힘든>, 황동규


그렇기에 때로는 내가 축적하고 있는 사회적 시간을 내 것으로 ‘자기화’하면서 내 이유를 되새긴다. 시간의 주인이 되고자 올바른 스토리텔링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 책을 (부담감과 주저함을 무릅쓰고) 기어코 끝마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결국 메타버스, 화면 속에서 시간을 쓰는 우리네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걸 한 번쯤 섬세하게 헤아리면서 우리가 저마다의 시간을 쓰는 방식에, 혹은 타인의 시간을 “착취하는” 양태에 질문해봐야 한다고 여겼다. 이대로 괜찮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화면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단답문일 수 없을 것이다. 삶은 끝없는 수수께끼다.



*다음 글에서는 어째서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전념하는지, 개인적인 동인에 관해 되짚어보려 한다. 기실 이 책을 준비하며 가장 나를 괴롭혔던 자기검열은 ‘이해해보자고 말하는 것의 무력함’이었다. 말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는커녕 밥이 돼 주지도 못할 때가 많다. 이해는 ‘그런가 보다’라는 미명 하에 없던 일만 못 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끝끝내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가. 그 정념에 대해 정리해보겠다.


*책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 구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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