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 프랑스 남자 고랑이 에게는 특별한 취미가 있습니다. 바로 백 선생님이나 '망치'라는 한국요리를 소개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거나 제가 한국에서 사 온 한국음식 요리책들을 펼쳐 보며, 본인이 먹어보고 아는 한국음식을 저에게 한국어로 말합니다. 때로는, 고랑이는 본인이 먹고싶은 음식사진이 있는 책 페이지를 들고오거나 영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올해 그는 생일에 '부대찌개를 꼭 먹고 싶다'며 한 달 전부터 생일상 메뉴를 부대찌개로 결정하기로 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고사리나물을 듬뿍 넣은 비빔밥, 돼지 묵은지 김치찜과 쌈밥도 물망에 올랐으나, 요즘 다이어트 중인 그에게 라면사리와 소시지를 푸짐하게 넣은 부대찌개가 아무래도 가장 행복한 메뉴였나 봅니다.
4월의 가을날
매년 고랑이의 생일쯤인 4월 말, 지구 반대편인 이곳은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됩니다. 추워진 날씨 덕에, 마트에는 이맘때만 보이는 제법 통통하고 노오란 향기로운 과일 손님 모과와, 동글동글 차올라서 빛깔이 고운 알밤, 반짝반짝한 대추, 그리고 고랑이가 밥 먹고 가장 좋아하는 후식인 단감이 마트에서 저와 고랑이를 반겨줍니다. 예뻐서 향기로워서, 맛있어 보여서 하나씩 집어 들었는데, 장바구니가 금세 가득 차 버립니다.
며칠 전, 장을 보면서 고랑이의 생일 케이크를 어떤 것으로 준비해줄까 고민을 했었는데, 보기만 해도 행복한 가을 재료들을 만나자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릅니다. 고랑이는 늘 먹고 싶다며,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며 요리책을 들고 와 몇번이나 보여주었지만 제가 손이 너무 많이 간다며 해주지 않았던 약식을 이번 생일에 케이크로 작게 만들기로 몰래 계획합니다.
밤약식
말린 대추를 깨끗하게 씻어서 물기를 제거한 뒤, 돌돌 말아서 잘라주기도, 길쭉하고 가늘게 잘라주기도 합니다. 남은 대추씨는 며칠 집에서 가을향을 내뿜으며 집을 밝혀주던 모과, 생강등을 넣어 약식의 밥물을 만들 겸 감기에 좋은 차를 넉넉하게 끓입니다. 한국의 마트처럼 쉽게 깨끗하게 잘 깎인 밤을 구할 수는 없어서 시간을 들여 밤을 칼로 깎고, 잣도 살짝 팬에 볶아주고, 호두를 뜨거운 물에 데쳤다가 오븐에서 다시 구워주고 먹기 좋은 한입 크기로 준비해줍니다. 눈치가 빠른 고랑이는 제가 밤을 깎는 모습을 보더니, 도와주면서 물어봅니다.
"자기야, 뭐 만들 거예요?"
"비밀!"
고랑이의 생일 전날 밤부터 시작된 밑재료 준비가 끝나고, 다음날 아침에 집에서 제법 떨어진 산책로를 몇 시간 걸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산책을 다녀오는 몇 시간 동안 잘 불려진 찹쌀과 함께 미리 끓여놓은 대추물에 흑설탕과 간장 등을 잘 섞어서 전기밥솥에 밤약식을 앉힐 준비를 합니다. 저나 고랑이 모두 계피향을 좋아하지 않아서, 계핏가루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많지 않아 보였던 밑재료들을 하나씩 전기밥솥에 넣으니 한가득 밥솥이 가득 해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고랑이는 저에게 물어봅니다.
고랑이: 자기야, 이거 약식이다! 맞지?
유자 마카롱: 네, 고랑이. 네가 먹고 싶다고 했던 약식을 밤을 많이 넣어서 만들 거야. 올해는 이게 너의 생일 케이크야.
고랑이: (커다란 눈망울을 보여주며) 진짜?
갑자기 눈이 동그라지며 활짝 웃는 고랑이는 책장에서 한국음식 요리책을 꺼내더니, '약식'페이지를 펼치며 잔뜩 기대를 하는 표정입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해줄걸' 하는 마음'을 담아 밥솥을 뚜껑을 잘 돌려 꾹 닫아봅니다.
처음 제 손으로 약식을 직접 해보고 나서야, 어릴 때 엄마가 저와 남동생의 생일이나 손님상에 올리기 위해 며칠 동안 서서 종일 음식 준비를 했던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흑설탕을 캐러멜 라이즈 했던 냄새, 엄마의 옆에서 두꺼운 책 위에 은행과 호두를 올려두고, 제 전용 하늘색 작은 망치로 껍질을 살짝 내리치며 쪼개진 껍질 안에서 조심스레 속에서 알맹이를 꺼내던 손가락의 느낌 , 커다란 압력솥의 묵직한 신호추가 칙칙-돌아가며 열기를 힘차게 내뿜는 소리, 갓 쪄진 약식을 호호 불어서 한 수저 떠서 입에 넣는 그 뜨끈하고도 달콤한 첫 술.
최고의 선물, 약식
약식이 쪄지는 동안, 부대찌개 재료를 부지런히 준비해서 식탁에 올려두니, 밥이 완성되었다며 쿠*가 노래를 부릅니다. 쿠*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고랑이가 밥솥 뚜껑을 조심스레 돌려 열어봅니다. '와!' 고랑이의 탄성과 함께 열린 밥솥 안은 익숙한 카라멜 빛깔에 반지르르한 약식이 우리를 반겨줍니다. 참기름을 약식 위로 휘휘 둘러준 뒤, 밥 주걱으로 조심스레 속을 잘 섞은 뒤 , 통통한 밤과 호두, 대추 등을 골고루 올린 약식 한 숟가락을 고랑이에게 호호 불어 건네줍니다.
천천히 한 입을 씹어보던 고랑이는 상상했던 그 맛있는 맛이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입니다. 작은 케이크 모양으로 만들어 나눠먹기 위해, 저는 약식을 꾹꾹 눌러서 모양을 잡은 뒤, 말린 듯이 둥글게 썰어놓은 대추와 잣으로 장식을 올려줍니다. 그 사이, 고랑이는 자꾸 약식을 집어먹어서 저는 살짝 가재 눈을 하며 쳐다보다가 웃으며 말해봅니다.
"생일 축하해, 고랑이! 약식 맛있어?"
"네. 약식 좋아요! 감사합니다. 자기야! 최고의 선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