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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May 07. 2021

언제 먹어도, 김치찌개

아마, 첫 타지 생활을 하며 셰어하우스에 산지 3주일쯤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전 일과 저녁일로 바빴던 저는 같이 셰어 하우스에 사는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는데, 퇴근하고 제 냉장고칸을 봤는데 작은 반찬통에 김치가 담아져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 사는 솜씨 좋은 한국인 언니가 김치를 만들었다며,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지? 얼굴을 통 못 본다. 밥이랑 꼭 먹어'라고 저에게 문자를 남겼습니다.


언니가 요리를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정말이지 몇 년 만에 맛본 집밥 김치는, 거의 반년만에 맛본 한국음식은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는 꿀맛이었습니다. 곧 김치는 바닥을 드러냈고, 남은 김치 국물과 김치 몇 점을 송송 썰어 참기름과 깨를 넣고 밥을 비벼먹을까 했는데 문득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국생활은 처음이고, 외국인들이 김치 냄새를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던 터라 김치찌개를 해 먹어도 될지 잠시 고민해봅니다.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을 어쩌겠어요. 언니가 김치를 집에서 만든 것을 보면 끓여먹어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하루 쉬는 날, 집안에 모든 사람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작은 냄비에 참치 통조림과 함께 김치찌개를 얼른 끓여 먹은 뒤 환기를 시키고, 향초를 몇 개를 피우며 분주하게 냄새를 제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저도 한식으로 잘 챙겨 먹지 않으면 체력이 떨어지는 나이가 되어서야, 같이 사는 언니와 함께 집에서 김치를 해 먹기 시작했고, 그 후 또 몇 년이 지나서는 '냉장고에 김치 3가지(배추김치, 총각김치, 묵은지) 이상은 항상 구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프랑스 남자와 살고 있으니 인생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나 김치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할 쯤이면 고랑이는 김치찌개나 김치만두를 해 먹자며 조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야 제가 빨리 새 김치를 만들거나 살 테니까요.



단감을 넣은 물김치와, 돌돌 말아서 만든 매콤한 물김치



김치찌개


비가 오고 날이 제법 추워진 가을 날씨의 연속이었던 요 며칠 동안은 국물 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콩나물과 소시지를 넣은 라면부터, 새우젓을 넣은 계란탕 등 국물요리를 몇 번 끓여먹었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에 내일 아침에는 돼지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 참치를 넣어서 만든 김치찌개도 부드러우니 맛있는데- 잠시 돼지고기와 참치 사이에서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또 입맛을 다시게 되네요. 


오랜만에 돼지비계가 적당하면서 넙죽하니 큼지막한 돼지고기가 김치와 함께 부드럽게 씹히는 상상을 하다가, 결국 저는 냉동실에 있던 돼지고기 얼린 것을 해동해서 남은 김치와 김치 국물에 이불 덮듯이 포옥 전날 밤 재워두고 잠이 듭니다. 이렇게 재워두면 정말 김치 맛이 돼지고기에 걷돌지 않고 속 안까지 쏙 베어서 있거든요. 내일 아침에는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을 생각에 빨리 푹 자고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 일찍 출근하는 고랑이를 배웅한 뒤, 쌀뜨물에 표고버섯과 다시마를 불려두는 동안 가볍게 운동을 합니다. 운동이 끝나고 난 뒤, 냄비에 약불에 들기름에 마늘과 파, 김치 양념이 밤새 골고루 밴 뭉뚝한 돼지고기를 달달 볶아주며 어젯밤부터 기다린 김치찌개를 드디어 시작해봅니다. 


어느 정도 돼지고기가 겉면이 익은 게 보이면 맛술도 한 스푼 넣어서 날려주고, 미리 준비해둔 쌀뜨물을 부어준 뒤 중불에서 뭉근하게 끓여줍니다. 혹시 참치를 넣고 싶다면 들기름 대신 참치 기름을 넣어서 준비해주시면 됩니다. 저는 냉동실에 보니 소분해놓은 치즈가 들어간 소시지 몇 개가 있어서 두어 개를 함께 넣어줍니다. 만약, 통조림 햄이 있었다면 살짝 칼로 뭉게 주듯이 넣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문득 스쳐갑니다.


무언가를 빠뜨린 것 같아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에 두부가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그나마 연두부 있던 것을 살짝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밥과 함께 먹을 준비를 합니다. 김치찌개가 끓을 동안, 계란 프라이 두 개를 치익-소리와 함께 노른자가 완전히 익지 않게 준비하고, 선반 위에 올려두었던 김도 꺼내어 본격적으로 김치찌개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가볍게 동글동글 통통 튀듯 보글보글 소리를 내던 김치찌개는, 어느새 재료들이 모두 어우러지면서 퍼지듯이 둥그르슮한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간을 보려고 입에 국물 한 숟가락을 머금어봅니다. 육수와 국물이 어우러져 기름이 한 겹 혀를 감싸는 듯한 여운을 남길정로도 제법 잘 끓여졌습니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김치찌개. 분주했던 아침의 끄트머리에서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밥 한술을 김치찌개 국물에 폭 담갔다가, 국물을 맛있게 머금은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봅니다. 그제야 오랜만에 앉아서 먹는 아침밥상에서 며칠간 머리 아프게 했던 것들을 건너편 빈자리에 툭 내려놓고 멀찌감치 지켜봅니다. 


언제 어디서든 맛있는 김치찌개 한 그릇쯤은 만들어 스스로를 먹여 살릴 힘과, 어렵고 힘든 시간의 빈틈에도 내가 나를 위해 만드는 행복들을 잘 채워 넣을 수 있는 그런 힘이, 저에게 있으니 김치찌개 한 그릇 맛있게 잘 먹고 다시 잘 지내보자고 스스로를 토닥여 봅니다. 


아, 이 김치찌개를 다 먹고 향초를 꼭 피워야 할 것 같아요. 저희 집 고랑이가 집으로 돌아와 이 김치찌개 냄새를 맡으면, 자기가 얼마나 김치찌개를 사랑하는 줄 알면서, 어떻게 저 혼자 먹었냐며 삐질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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