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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뉴스 Aug 15. 2023

공단 이야기

공단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도금 공장 옆을 지나면 굴뚝에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곤 했는데, 그곳에선 늘 쉬어빠진 쇠 냄새가 나곤 했다. 이곳엔 다양한 공간이 함께 모여 있었다. 먹을 것을 만드는 곳도 있었고 전선을 만드는 곳도 있었으며 나무를 깎아서 널판을 만드는 곳도 있었고 컴퓨터의 부속품을 만드는 곳도,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곳도 있었다. 이 공단을 하루 종일 휘젓고 다니며 비좁은 지옥을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만드는 작은 마을버스만이 공단의 모든 생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일하는 곳 외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공간 안에서 24시간 쉴 새 없이 기계가 돌아갔고 기계들은 사람들이 서서 일하길 요구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피로에 의해 자신과 자신의 영역을 제외한 모든 것에 무신경해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 마을버스를 타지 않을 수 있었는데, 나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덕분에 기숙사에서 공장을 오가는 쾌적한 버스에 앉아서 투명한 차창을 통해 공단의 일출과 일몰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나의 공단이 아니라 여러 공단이 함께 자리하였고 하늘을 금방이라도 찢어 버릴 것만 같은 굴뚝이 많았기 때문에 늘 미세먼지가 머무는 동네였다. 그리고 바다를 메워서 만들어낸 땅도 있었으므로 늦은 밤 혹은 이른 아침이면 과거를 잊지 않은 물안개 무리들이 자신의 옛 터전으로 회귀하곤 했다. 먼지와 물안개는 세력 싸움을 하듯 저 먼 태양에서 불어오는 붉은 입자와 광자들을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그래서 그 붉은 입자와 광자들은 더욱 열이 받고 더 붉게 물 들어서 하늘을 붉은색 스펙트럼으로 수놓곤 했다. 그런데 그곳에 처절한 아름다움이었다. 밤새 걸었기 때문에 이미 녹초가 되었거나 아침부터 종일 걸어야 하므로 곧 녹초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예정하고 있는 처절하고도 찬연한 아름다움이 눈부시게 산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산란하는 우주의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세상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2005년 3월이었다.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면, 대다수의 고등학교 3학년과는 달리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러한 선택으로 인하여 몇 년간 자신의 운명이 얼마만큼 요동칠지 예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코 자유로운 선택이라 말할 수 없음에도 그들은 자유의지를 발현했고 결국에는 선택하곤 했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의 선택을 보호자의 이름으로 승인했으며 학교는 그들의 선택을 통해 교육부로부터 얼마간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선택은 제도와 정책,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착취 역시 제도와 정책,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이것들에 의해 그들이 물려받은 이름은 실습생이었다. 나 역시 하얀 배경에 검은 글씨로 쓰인 이름을, 회사의 로고가 박힌 실습생 명찰을 지급 받았다. 그리고 작업복 왼쪽 가슴 주머니 상단에 명찰을 패용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퇴출되어 실습을 할 수 없었으므로 나의 신분은 그렇게 가슴팍으로부터 결정 지어졌다. 나를 포함한 실습생 몇몇은 마치 자동기계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리를 부리는 소리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그 소리들 하나하나를 단 하나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소리를 결코 그들에게 전할 수 없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더 이상 나의 소리가 그들에게 전해 질 수 없다는 경험으로 인하여, 앞으로도 나의 말과 언어가 모든 세계에 전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두려움에 떨었다. 나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처분에 의해서만 나의 일상이 나아질 수 있는 예외 상태를 몹시 두려워했던 것이다. 200평 쯤 되는 공간에서 낮에는 10시간을 밤에는 12시간 정도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어느 도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김밥 집에선 김밥이 한 줄에 1500원 이었는데, 우리는 한 시간에 2950원을 받았다. 한 시간을 일하고 김밥 두 줄을 먹기에는 50원이 모자랐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높고 낮은 것을 경험했다. 정규와 비정규 사이, ‘비(非)’라는 한 글자 사이에 담겨 있는 사회의 이치와 논리를 포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 한 글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한다. 


 달마다 지급되는 월급 명세서 또한 삶의 업적이었으므로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98만원, 126만원, 149만원, 143만원, 130만원, 110만원, 80만원, 62만원…. 날이 뜨거워질수록 성수기였고 날이 차가워질수록 비수기가 되었다. 일하는 시간에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는 그 시간이 ‘꺾기’를 당해서, 하루 4시간만 일하고 퇴근하는 날도 늘어갔다. 처음엔 이러한 휴식을 달갑게 받아 들였다. 그러나 일한만큼만 받을 수 있다는 불법적 법률에 맞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몸을 깎아서 짜낸 노동의 값어치가 결국 62만원에 팔리는 날이 되어서, 신경질적 면모를 드러냈다. 나는 왜 대부분의 고등학교 3학년과 달라야만 하는지 나의 어머니에게 따져 물었다. 먼 바다 한 가운데에서 폭풍이 몰아쳤음에도 나의 어머니는 그 먼 곳에서 모든 파도를 다 감당해야만했다. 사실, 내가 몰아세우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가 아니었으리라. 사실 내가 응시하고 향해야만 했던 곳은 아마도 이 세상이었을 것이다. 12월이 되어 결국 퇴직서류에 서명을 했다. 나의 ‘환송회’가 열리는 날에, 노동조합의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친한 아저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그는 나에게 자신이 “비(非)”자를 떼어 줄 수 있노라고 말했다. 높은 그가 낮은 나에게 말했을 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다시는 이 태양이 산란하는 도시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다음 날 퇴근하여 안산역으로 향하는 길목 어딘가에서 가슴팍에 붙어있던 명찰을 떼어냈다.  


 그랬다. 나는 역시 운이 좋았다. 공단을 벗어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도는 나의 게으름을 보호해 주었다. 실습생에 대해서는 특별한 학적관리 원칙이 적용된 덕분에 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휴식을 누비면서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밤늦게 잠 들어서 점심쯤 일어나는 생활을 하여도 이러한 게으름은 그동안에 겪었던 “고생”이라는 단어로 정당화 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앞날이 예견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한 두려움에 막막함을 느꼈다. 더 나락할지 모른다는 첫 두려움을 느낀 이후에 스무 살이 되어가며 두 번째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함께 나이를 속이고 들어간 술집에서 소주병을 해치우면서 사람이 많은 어느 길목을 점령하고는 커다란 인형이라도 팔아 재끼자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물론 그때는 그 말들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운이 좋은 놈이었기 때문이다.


 생각도 못한 장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고 별 기대 없이 이력서를 작성했으며 별 생각 없이 짧은 면접을 보았다. 별 기대가 없고 별 생각을 하지 않았던 덕분인지 몰라도 편하게 대화하고 나온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인상이 좋아 보였다. 여유 있어 보였고 대단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면접이 끝나고 직원들만 타고 다니는 통근 버스를 얻어 탈 수 있었다. 나와 함께 면접을 본 몇몇은 그 버스를 타고 강남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새 직장을 얻었다. 나는 그곳을 사랑했다. 나를 받아준 회사를, 나를 뽑아준 사람들을 사랑했다. 나에게도 명함이 생겼고 내가 다니는 직장 이름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이제 저는 제대로 된 삶을 삽니다. 저도 버젓한 대기업의 정규직 직원입니다!” 명함을 하나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면목동에서 논현역까지, 논현역에서 다시 용인까지 먼 길을 오고 다녀야 했지만, 나에게 따라 붙은 칭호는 그 고된 디아스포라를 견디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한 달을 채우고, 두 달을 채운 후 처음 받은 월급 명세서를 보면서 나의 사랑은 아주 빠르게, 조금씩 시 들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기 시작한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높고 낮은 둔덕들이 자주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역시 나는 운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서나 잘 길들여지는 사람이었다. 길들여지지 않으면 찾아드는 고통을 감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단의 햇빛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바닥에 떨어진 명찰이 수두룩했지만, 마지막 명찰은 바로 나의 것 이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음의 결과는 단순하다. 길들여지거나, 길들여지지 않거나. 나는 전자에 속하는 부류였다. 나의 생존으로 이룩한 것은 짙은 노란 불빛과 이름도 모를 화학 약품으로 가득한 먼지 없는 방에서의 시간들이었다. 방진복을 입고 안면을 온통 뒤 덮는 마스크를 쓰고 실크 장갑, 그 위에 다시 얇은 고무장갑을 끼며 하달된 명령을 수행했다. 그들과 한편에 되었다고 느꼈지만, 그들은 늘 위에, 나는 늘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일 뿐이었다. 그것이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칭호가 생겼고 명찰이 아닌 명함이 생겼으며 나를 관리하고 조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은 쉽게 잠재우지 못했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돈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돈을 많이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자주 이끌어 내곤 했다. 생존의 굴레를 생각하며 말 하건데, 명찰과 명함이나 그 가격이 엇비슷하다는 사실이 내게 큰 충격이었다는 것을 결코 감출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낮은 곳에 자리 잡은 사람이고 낮은 곳에 자리 잡은 사람은 결코 바꿀 수 없는 법과 질서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 법과 질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법과 질서에 도달하여 법과 질서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법과 질서를 바꾸어 새로운 법과 질서를 창출해낼 것이다. 그것만이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스스로 말을 잃었다. 나의 요구와 반응은 철저히 가두고 반란을 수행하는 군인처럼 눈빛을 잃었다.   


 바닥에 쳐박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얼굴 없는 누군가가 날 쫓는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넘어진다. 다시 일어나서 죽을힘을 다해 뛴다. 날 쫓는 무서운 것의 두터운 손짓이 내 등을 스친다. 그러나 나는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뛴다.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하는 꿈을 꾸다가, 항시 말미엔 바닥에 처박혀 그 얼굴 없는 무엇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응시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새벽 4시 반, 나의 이른 출근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죽어 있는 것이 아님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몸을 씻고 옷을 입고 아직은 어두운 거리를 나서기 시작했다. 첫차에는 오히려 사람이 많은 법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 안에서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이러한 투쟁이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첫차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 또한 그 대열에 섞여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투쟁의 대상은 무엇일까. 투쟁의 방식은 어떠한가. 그리고 투쟁의 효과는? 뚝섬유원지역에 도착하여 청담역을 향해 전철이 출발 할 때 가느다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단에서의 태양이 한강 위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빛줄기를 힘껏 낚아채고 싶었다. 그것을 내 삶 안 깊이 들이 민다면, 아마도 더 이상 구원받지 않으리라. 태양의 구원이 온 삶을 뒤 덮어 미세한 통증마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하리라 믿었다.   

 나의 입사 절차를 진행했던 인사과 직원은 퇴사 절차 또한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 정도 많은 남자였다. 그는 내가 제일 오래 다닐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 때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저 둔덕을 넘어, 법과 질서를 정복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을, 나의 생각을 가장 빠르게 배신한 사람이었다. 즐거운 배신, 즐거운 배반. 그렇다. 모든 것이 두렵지만 결코 하지 않을 수 없는 배신이자 배반이었다. 나는 배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와 법인이 만들어낸 그 규칙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둔덕에 오르기 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첫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팀을 옮겨야만 했다. 나의 상사는 나와 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십대가 되어 겨우 과장을 달게 된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비슷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제대로 일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금세 그 사람과 나의 차이를 감지했다. 그는 그 둔덕을 무시하려 했다. 그 둔덕 너머의 둔덕을, 그 둔덕 너머의, 너머의 둔덕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 둔덕 아래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반면에 나는? 나 역시 생존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지만, 나는 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게 나무라곤 했다. 더 배우지 못한 네가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맞는 말이었다. 명함을 벗어난 이 세계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 명함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에서 나의 위치와 존재는 다소간 증명될 수 있지만, 그 명함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진실에 부쳐 더 큰 진실을 덮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확정지은 진실은 단순했다. 바로 서자는 것, 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서지 말고 나의 것으로 서자는 것. 명찰을 떼어버린 직후에 해야 할 일을 1년 5개월이 지난 후에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때로는 배반을 저질러야만 한다. 반란에 대한 반란을 저질러야만 종국에 도망가야 할 세계와 그 세계로 향하는 도주로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내 작은 명함에 의지하고 있던 얼마간 가족들도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마음이 걸렸다. 하지만 결국 선택했다. 


 물론 이러한 선택이 결코 내 힘으로 세상을 힘껏 살아가겠다고 하는 “바른 욕망”과 “위험을 향한 여정”과 같은 아름다운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페이지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 페이지에 첫 장은 너무나 빨리 죽어버려서 나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장은 나를 너무도 사랑해 주었지만, 그 사랑의 결과를 결코 남기지 못했던 주정뱅이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였다. 바로 서고자 하는 힘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 대한 원망, 증오였다. 그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 하지만 한편 그들이 보아도 괜찮다고 할 수 있을만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것, 그래서 바로 서고 싶다는 것, 그것이 나의 짧은 페이지들을 채운 검은 각인들이었다. 내 삶은 그들의 죽음으로 길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죽음과 바른 욕망 사이를 저울질하고 어느 한편에 섰다가 다시 다른 한편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는 삶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시작에서 비롯된 첫 번째 시작이 바로 저 둔덕 너머의 세계로 가고 말겠다는 나의 선택이었다. 나를 속이는 일은 늘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물 같은 것을 평생토록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렇게 견디기 보다는 차라리 그 물을 뒤집어쓰는 편이 났다. 막상 온몸이 젖고 나면, 두려운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 자신의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세상에 한해서만 말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선택을 뒷받침한 보증 문서는 사랑에서 우러나왔다. 선택에 다가서기 6개월 전 쯤 이었다. 스물한 살이 된 나는 그 여인과 처음 만난 날 키스했다. 그녀와의 키스는 오랜 시간 이어졌다. 몸과 몸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와의 교감에 흠뻑 빠져 들었다. 아무것도 보잘 것 없는 나의 볼을 먼저 쓰다듬어 주고 입맞추어준 사람이 나타났고 나는 그 사람에게로 홀연히 빠져 들었다. 우리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지 않았으므로 그녀와 나의 불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불과 이, 삼일 만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내 삶에도 기적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온전히 모든 감각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의 불씨는 금방 꺼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외로움은 결코 나 하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며칠을 보냈다. 세상을 향하여 비련을 과시했고 내 존재의 불쌍함을 말했으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그 끝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결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사랑받을 수 없다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그때는 사랑 받아야 함에만 골몰했던 것이다. 나는 결코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러한 시간을 얻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선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바로 설 때, 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함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오랜 시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세상을 알아 가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앎의 의지를 품고서 사람과 사물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그 순간의 지혜란 바로, 지식의 확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확장을 통해서 결코 닿을 수 없었던 그 둔덕에 그토록 닿으려 했다. 그래서 나는 법학을 전공했다. 그들의 언어, 높은 곳에 존재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배우기 위하여, 그 자들의 언어로 이루어진 규칙과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이미 우리말을 할 줄 안다. 그러나 그러한 말로써 논리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일이었음을 배우지 않아도 직감하고 있었다. 또한 오랜 시간 내가 겪어왔던 콤플렉스로부터 한껏 도망치려는 시도가 내포 되어 있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세계, 내가 가진 조건과 환경을 경멸했고 그러한 경멸의 끝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경멸의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언어를 배워서 규칙을 바꾸고 싶다는 표현은 나 또한 기득권이 되고 싶다는 내밀한 욕망을 보기 좋게 꾸며주는 미사여구인 셈이다. 그렇다. 나는 지배당하기 보다는 지배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나의 시도는 다행히 성공을 거두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내 이력서의 학력란은 한 칸씩 늘어갔다. 그리고 늘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 사람을 보라!” 


 몇몇 페이지들과 그 페이지의 모서리에 작게 쓰인 이야기들을 모두 합쳐 보건데, 내가 병을 얻는 것은 회복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책장에 빈공간이 줄어들수록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색 안경이 늘어가는 것이므로 여러 안경으로 시선을 맛보며 내 페이지들을 다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정독을 통해 발견한 것은 두 눈을 붕대로 감고서 그 둔덕을 향해야만 한다고 강박적으로 외치고 있는 어느 패잔병이었다. 그의 반란은 성공했지만, 반란 이후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으므로 그의 반란은 실패한 것이다.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떠한 일을 해야 할지, 어떠한 일을 해야만 하는지를 선택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선택하지 못했다. 외면의 고요, 내면의 폭풍을 동시에 겪으면서 나의 바다는 점점 메말라 갔다. 깊은 불안과 우울로 밤과 낮의 구분 없이 지내는 시간이 있었고 수면제 없이는 결코 그 예전 곤두박질치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순간들이 다가오곤 했다. 이십대 중반을 조금 넘은 어느 시점에 나의 큰아버지도 생을 마감했다. 전통적 의미의 가족 체계를 생각했을 때, 이제 내가 어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가문의 대표자이자, 대(代)를 승계할 유일한 장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가문의 상속인이었다. 하지만, 내가 물려받은 재산은 값어치 있는 것은 하나 없이, 처참하게 공중에 흩날리는 그들의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유산을 토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길게 침잠하며 생각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높고 낮음을 가르는 그 둔덕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들의 죽음에서 기인한다는 사실, 지금은 이것이 내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피와 살을 흡수한 봉분(封墳)이 되었다. 스물여섯, 나는 그들의 삶과 죽음으로 태어났고 또 한 번 그들의 삶과 죽음으로 죽어가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상태, 견뎌 낼 수 없는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 시간은 어떻게 도래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주의 기나긴 침묵, 크나큰 침묵 앞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어느 순례자의 발걸음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걸을 수 없으므로 써야만 했던 것이다. 


 거대한 삶의 터전 어느 한 구석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다. 그 구덩이 안에서 울음이 새어 나온다. 안을 들여 본다. 그러나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시작된 울음, 그 울음의 굴레가 내 삶을 휘감고 있다. 침묵하는 존재들의 울음을 나는 듣고 느끼면서 그것이 내 울음이 되기까지 긴 시간을 견뎌야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학교를 다니는 긴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 안에서 나는 그 구덩이를 향해 기어 들어갔고 그 구덩이 안에서 과거의 시간들과 직면했다. 나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의 죽음으로 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사건들, 오히려 내가 진정으로 태어난 장소는 그 사건들의 무덤이다. 나에게 말이 솟아오르던 시점은 그 무덤의 백골들이 모두 부식해서, 이제는 결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리고 그 모든 것이 땅에 스며들어 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인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피와 살, 뼈와 혼을 자양분 삼아 내 이야기의 역사를 서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서술로 끝끝내 찾아내고 싶었던 것은 살아가는 것의 이유, 삶의 의미였다. 그때는 이유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곧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그것들을 만들어 내거나 주조할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나의 발병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원치 않게 죽어갔지만, 나는 스스로 죽어가는 것을 원했다. 죽음의 문턱에 스스로를 세우고 다시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짧은 반복들이 있었다. 그 시간을 이겨 낼 때 마다, 내 안에 생동하는 처절한 진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 진실 중 하나는 삶이 너무나 척박하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삶이 너무나 외롭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나는 그러한 삶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십대 후반을 향해 가면서, 나는 점점 살아가길 원하고 있었다. 자신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나의 내면의 척박함을 확인했고 이 척박한 세계를 외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비옥하게 채워갈 수 있으리란 확신을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무덤을 보기도 했고 말 되어 질 수 없는 고통을 발견했고 그들의 삶에서 총총하게 피어오르는 별을 찾아내기도 했다. 나는 세상의 일부였다. 세상에 산재하는 그 고되고 혹독하다는 옻나무 같은 것들이 오직 나에게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른 죽어가는 모든 것을 통해서, 고통은 삶에 과정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느끼거나 받아 들 일 수 없었던 그 진실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 때문에 한걸음 내딛는 것조차 버거운 나의 할머니가 장화와 목장갑을 끼고 마대 자루를 손에 쥐고서는 나를 향해 겨울 날 대낮에 뜨겁게 내리 쬐는 햇볕 같은 웃음을 던지면서 부터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살아내지 않았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잃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취약한 운명을 타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욕망하고 계획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행위하며 노력한다. 손에 쥐었던 것은 언젠가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잘 알고 있음에도 그 앎을 주기적으로 배신하는 이 반복되는 놀이의 밑바닥엔 얼마간 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대전제가 아카시아 나무뿌리처럼 흙 밑에 모습을 깊숙이 감추고 옛 사람들의 시신을 갉아 먹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땅 밑의 진실을 믿더라도, 얼마간은 더 살 것이다.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이런 애매하고 모호한 진실뿐이다. 확정되지 않은 진실, 확증까지는 시간을 대가로 하는 그 진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러한 질문의 반복이 나를 삼십대라는 숫자로 이끌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의 예상과는 달리 나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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