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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ny Aug 30. 2017

코플랜드 하우스에서 만난 김택수

미국 음악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뉴욕 주 작은 마을 코트랜트(Cortlandt)의 바위 언덕에 오롯이 세워진 집이 있다. 이곳은 ‘국립 역사 유적(National Historic Landmark)’이자 연방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 유물 보호 프로그램(Save America’s Treasures program)’의 공식 프로젝트로 선정된 곳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애런 코플랜드는 마지막 30년의 여생을 이 집에서 보냈다. 그가 떠난 후 지역 주민들은 ‘코플랜드 하우스’라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하여 천재의 영감이 숨 쉬는 전당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코플랜드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가구, 악보와 서적과 음반자료, 그리고 작곡 스케치, 메모, 편지, 그리고 그의 피아노까지 코플랜드의 생전의 흔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작은 박물관과도 같다. 뉴욕타임스의 표현대로 자연에 둘러싸인 이 작은 시골집은 영감으로 가득한 곳이다.

 

Copland House 전경


1998년 처음 시작된 ‘코플랜드 하우스 레지던시 어워즈(Copland House Residency Awards)’는 미국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수여하는 가장 명예로운 상 가운데 하나이다. 사무엘 아들러(Samuel Adler), 조지 크럼(George Crumb), 스티븐 스터키(Steven Stucky) 등과 같은 미국의 대표 작곡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매년 8-10명을 선정하고, 1년에 걸쳐 한 명씩 번갈아 코플랜드 하우스에 3-8주가량 상주할 수 있도록 초청된다. 이 기간만큼은 거장의 공간을 공유하며 천재의 영감이 숨 쉬는 곳에서 작곡과 연구에 집중할 최적의 환경을 보장받는 셈이다. 수상자들에게는 교통, 숙소, 음식 제공은 물론 이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차량과 생활비도 제공된다. 이밖에 레지던시에 선발된 작곡가들 가운데 한 명을 격년제로 선정하여 7천 달러의 음반 제작 지원금을 지급하는 ‘실비아 골드스타인 어워드(Sylvia Goldstein Award)’를 비롯하여, 보로메오 현악사중주단이 선정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한다.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곡가의 선두주자로 주목받는 앤드류 노먼(Andrew Norman)은 2005년도 수상자였다. 2011년에는 시카고 소재 루스벨트 대학교의 작곡과 재직 중인 최경미가 한국인 최초로 선정되었고, 올해 선정된 9명의 수상자 가운데 2명의 한국인 작곡가들이 이름을 올렸다. 코리안 심포니의 상임작곡가이자 오레곤 주에 위치한 루이스 앤 클라크 대학(Lewis & Clark College)과 포틀랜드 주립대학교(Portland State University)에서 가르치는 김택수와, 프린스턴(Princeton Universtiy) 작곡과 조교수로 재직 중인 서주리가 그 주인공이다.


최근 완성한 자신의 작품 '평창을 위한 팡파르'를 설명하고 있는 작곡가 김택수


지난 7월 레지던시를 가졌던 작곡가 김택수를 만나기 위해 코플랜드 하우스를 찾았다. 마침 그는 평창 대관령음악제로부터 위촉받은 ‘평창을 위한 팡파르’를 완성해 한국으로 보낸 직후였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의 안내로 코플랜드 하우스 내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김택수의 자필 악보를 보게 되었다. 최종본이라도 해도 될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예술 작품과도 같은 악보였다. 그는 제일 처음 손으로 그린 스케치를 여러 단계에 거쳐 수정 보완하는 과정을 거쳐 작곡을 진행한다. 그런데 최종본을 위해 악보를 컴퓨터로 입력하는 과정 직전에 다시 한번 스케치 최종본을 작성한다고 했다. 잠시 스쳐간 영감의 흔적조차 꼼꼼한 기록으로 남겨두려는 치밀한 그의 의도가 엿보였다. 


김택수가 말하는 자신의 가장 큰 고민은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이었다. 그의 최근 행보를 살펴보면 국악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재작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은 20주년 기념 음악회를 위한 곡을 김택수에게 위촉하여 화제가 된 바 있고, 지난 4월 뉴욕에서 플루티스트 최나경이 초연한 플루트 협주곡 ‘뒤틀린 시간’에도 수제천을 인용했을 만큼 그는 우리 전통 음악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한국 작곡가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인물은 윤이상과 진은숙인데, 지금은 양 극단에 놓인 두 작곡가들을 교대로 바라보며, 과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혹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지를 고민하고 있다며 자신의 정체성을 아직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라 덧붙였다.



코플랜드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 거슈윈은 체계적 작곡 공부에 목이 말랐다. 그래서 그는 유럽에서 최고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라벨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한 거슈윈을 알아본 라벨은 그를 돌려보냈다. 반면 코플랜드는 프랑스에서 만난 명교수 나디아 블랑제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가진 틀을 깼고 ‘미국적 클래식’의 토대를 성공적으로 마련했다. 


미국의 클래식 음악사는 애런 코플랜드를 기점으로 나뉜다. 그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코플랜드 하우스가 벌이는 ‘컬티베이트(Cultivate)’라는 프로젝트는 재능 있는 젊은 작곡가 층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매년 선발된 6명의 작곡가들은 1주일 동안 저명한 작곡가 패널들을 초청해 세미나와 작품 발표회를 여는 프로젝트를 올해로 6년째 이어가고 있다. 하우스 근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코플랜드 하우스는 사방이 꽉 막힌 듯한 곳에 영감의 들숨과 날숨이 교차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 작은 창과 같다. 이들이 표방하는 슬로건처럼 이곳에서 미국 음악의 과거와 미래가 만난다. 생명력 있는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그 기초를 잡아가는 젊은 작곡가들의 거친 여정에 생수와 같이 시원하고 든든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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