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 2017
플로리다 디즈니월드의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숙박 업소라기보다는 장기 월세방이 되어버린 모텔의 화려한 색깔은 그들의 고단한 삶과 대비되며 더욱 슬프게만 느껴진다. 그들의 세계와 건너편의 디즈니월드 사이에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틈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그곳이, 그들에게는 그저 쳇바퀴 돌 듯 지루한 일상의 배경일 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디 앨런의 ‘원더 휠(Wonder Wheel, 2017)’이 떠올랐다.
“코니아일랜드는 자본주의의 격렬한 환상이다. 그곳은 꿈과 모험의 나라이며, 아직 자본의 권력에 휘둘리지 않았던 동심으로 돌아가 모두가 행복하기만 한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꿈과 모험과 동심을 얻기 위해서는 입장권도 사야 하고, 기구 이용료에, 음식이며, 기념품까지 결국 모든 것에는 돈이 필요하다. 자본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꿈과 모험과 동심인 것이다. 자본과 교환된 이상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해야만 한다. 행복하지 못하면 돌아오는 것은 죄책감이라는 처벌뿐이다. 코니아일랜드라는 행복의 환상 속에서 회전목마를 수리 하고, 음식을 나르는 존재들은 철저한 타자인 셈이다. 코니아일랜드에서 가장 돋보이는 놀이기구인 원더 휠(wonder wheel)은 그들의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그리고 더이상 올라갈 수 없도록 그들을 옥죄고 있는 계급의 상징이다.(문화뉴스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
핼리와 무니, 애슐리와 스쿠티, 젠시, 그들의 삶은 겉으로 찬란해 보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슬픈 이면이다. 누군가가 디즈니월드에서 동화 속 주인공으로 행복한 시간을 누리는 대신, 누군가는 구걸을 하고, 사기를 치며, 성 매매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들에게 ‘동화’란 없다. 철저히 소외된 삶이 있을 뿐이다. 무니와 스쿠티, 젠시와 같은 아이들은 낯선 차에 침을 뱉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풍선을 던지는 것이 일상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디즈니월드라는 자본의 환상을 향유하는 동안, 그 누구도 이들을 떠올리지 않는다. 이들은 그야말로 미국 자본주의의 공백인 것이다. 공백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숨길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을 위한 사회의 배려라는 것은 진정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선한 일을 한다는 믿음이 주는 안정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있는 눈가리개가 필요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젠시의 생일날, 핼리와 무니는 호숫가 건너편 디즈니월드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선물한다. 아무도 그들을 위해 불꽃을 쏘아 올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삶 속으로 그 환상을 끌어안는다. 가난하다고 하여 삶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듯.
한편 성매매를 한 것이 발각된 핼리는 무니와 헤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미 어른들의 불길한 표정에 익숙한 무니는 젠시의 집으로 도망을 친다. 문을 열어주는 젠시를 보고, 무니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만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무니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엉엉 우는 것뿐이었다. 무니의 눈물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영화는 내내 슬펐지만, 이 장면에서는 정말 가슴에서 뭔가 욱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젠시는 우는 무니의 손을 꼭 잡고 디즈니월드로 달린다. 그들을 구해줄 환상을 찾아서.
덧붙임,
나중에 알고 보니 디즈니월드는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아이폰으로 찍은 영상이라고 한다. 화면의 다른 질감은 젠시와 무니의 상황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 느껴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