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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Aug 09. 2019

걷기의 미학

 우리 동네에는 유난히 언덕이 많다. 특히 내가 사는 곳은 거짓말을 아주 조금 보태자면 아랫동네와는 기온이 다를 정도로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경치 좋은 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는 절묘한 위치이다. 건너편 언덕에는, 올라보면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것만 같은 풍경의 북정 마을이, 다른 쪽으로는 근래에 꽤 유명해진 이화동 벽화마을과 낙산공원이 있다. 한가한 시간이면 가족들과 이곳저곳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지를 걷는 것보다는 체력 소모가 있지만, 그래서 걷고 나면 좀 더 개운한 느낌이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에 가장 망설였던 이유인 무수한 언덕들이 이제는 걷기 좋아하는 우리 가족이 이곳에 사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우리 가족은 특별히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닌다. 아버지가 은퇴하신 이후 우리 가족의 걷는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 모든 언덕을 섭렵하자 이제는 성북천이 보였다. 성북천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청계천에 이른다. 반려인을 데리고 산책 나온 개들은 물론이고, 풀숲으로 숨어다니는 도도한 고양이, 물길 따라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 가족이 산책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준다. 운이 좋으면 물 위로 머리만 빼꼼히 내민 거북이도 만날 수가 있다. 언뜻 익룡의 후예로 보이는 왜가리들이 성북천 주변 건물 모서리에 동상처럼 앉아있다가 멋지게 날아들기도 한다. 


 내가 걷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나와 여행하는 것을 최대한 피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올레길에서 난 흡사 물 만난 고기였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계속 걸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올레길 중간중간에는 개발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곳들이 많았다. 깊은 밤에 그런 길을 만나면 오로지 휴대전화 불빛에 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더러는 낭떠러지 위를 기어가기도 했고, 막다른 길에서 철조망이나 담을 넘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친구를 끌고 한라산에 오르기로 한다. 진달래밭 대피소였던가? 아무튼, 정해진 시간 안에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면 정상 등반을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채로 우리는 무작정 출발했고, 올라가던 길에 다른 등산객을 통해 정보를 얻게 되었던 것 같다. 이리저리 계산해보니 결론은 결코 정상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마침 우리 옆으로 한 소대 정도의 군인들이 훈련을 위해 산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저거다, 난 그대로 군인들의 뒤를 따라 산을 뛰어올랐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정.상.등.반! 결국 세 시간쯤 걸린다는 길을 한 시간 반 만에 올랐고, 우리는 당당히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실은 정상에 올라 어떤 광경을 봤는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숨 쉴 힘만 겨우 남아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 하나는 서울에 올라오고 며칠 뒤, 까맣게 멍들었던 양쪽 엄지발톱이 모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그해 여름을 난 발톱이 없는 채로 지내야 했다.


 친구나 가족과 함께 걷는 것도 좋지만 혼자 걸으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내 삶에 대해, 친구들에 대해, 혹은 스쳐 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2011년도에 나왔던 나의 2집 음반에 ‘비 오는 저녁’이란 곡은 그렇게 홀로 걸었던 어느 날의 일기이다. 


비 오는 저녁 집으로 가는 길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시간은 흘러가고 빗물도 흐르는데 기억만 그대로 머문다.


차가운 바람이 지난 흔적들 그 위로 계절은 지나고

널 그리며 읊조리던 마음 흩어진 멜로디


가로등 불빛도 어느새 사라지고 나 혼자 그 길을 걷는다.

무겁던 마음 가만히 내려놓고 나도 모르는 날 찾는다.


 당시에는 죽을 것 같이 괴로웠던 걱정거리들을 짊어지고 집으로 가던 길, 집을 지나쳐 무작정 길을 걸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어둡고 습한 저녁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꺼질 때쯤, 함께 걷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 걷는다고 하여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복잡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이제는 집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을 맞이한다. 내일은 또다시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이 시작될지언정, 일단 지금은 ‘살겠다’라는 마음이었다. ‘걷기’에는 이렇게 신비한 힘이 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는 반대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있다. 20대의 중반 즈음에 다이어트를 위해 매일 산에 오르던 때가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올랐다.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전쟁과도 같았다. 당연히 머릿속에는 정상에 도착해야만 쉴 수 있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다 못해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오는 순간, 정상에 도착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숨이 차오를 무렵, 작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산을 오를 때는 나름의 ‘리듬’을 갖고 걷는 게 좋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르는 노래의 리듬에 맞춰 규칙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지금도 폐활량이 엄청나게 좋은 편인데, 아마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쁜 숨을 누르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호흡이 필요했고, 그 뜻밖의 훈련(?)은 극심한 무대 공포증이 있는 내가 무대 위에서 목소리를 떨지 않고, 마치 여유로운 듯 노래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걷기’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선물을 주기도 한다. 


 걷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들은 빨리 눈에 띄지 않는다. 천천히, 오랜 시간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이는 마치 음악가의 연습과도 같다. 오늘의 연습이 내일 나의 연주를 당장 멋지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연습은 다른 여느 날들의 연습들과 함께 쌓이고 쌓여 미래의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날 것이다. 연습은 ‘몸’이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굶는다고 하여 당장 내일 날씬한 내가 되지 않듯, 오늘 팔굽혀 펴기를 백번 한다고 하여 당장 내일 근육질의 내가 되지 않듯이 말이다. 우리의 몸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반복하지 않으면 절대 바뀌지 않는다. 틈만 나면 원래대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우리의 몸이다. 그래서 음악가의 연습은 게을러서도, 그렇다고 조급해서도 안 된다. 걷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적당한 주기로 꾸준히 걸었을 때만이 선물을 얻을 자격이 주어진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늘 조급하다. 최소 환승과 무빙 워크의 편리함은 조급하다는 사실조차 깨달을 수 없도록 우리를 무디게 만든다. 기술의 발달은 음악가의 연습 과정에도 여러 가지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때로는 조급하게 연습의 결과물을 얻으려 한다. 모든 생활의 리듬이 빨라진 것이다.


 앞으로도 기술은 더욱 발전할 것이고, 우리는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그 옛날,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던 선비의 몸, 혹은 18세기 서양 음악의 기초를 마련했던 바흐의 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좀 더 적게 움직이길 원하고, 좀 더 빨리 연습의 결과물을 얻길 원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인다. 물론 나 역시 그러한 ‘편리함’에 길들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한 번씩은 ‘걷기’가 나에게 주는 선물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걷지 않았더라면 얻지 못했을 그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의 우리는 잊고 있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느꼈을 그 ‘행복’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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