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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Oct 31. 2021

<뿔>

다락방의 미친 여자

등장인물

친구

주인

     

늦은 밤     


인적 드문 곳의 게스트 하우스.

게스트하우스의 방은 앤티크하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고, 그 위로 넓은 침대가 하나 있다. 침대 옆 선반에는 촛대, 거울, 탁상시계 같은 소품이 놓여있어 앤티크한 분위기를 살려준다. 침대와 살짝 거리를 두고, 둥그런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다. 테이블 옆에는 보라색 커튼이 쳐져 있다.




비가 매섭게 내리고 있다. 간간이 천둥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주인이 양손에 캐리어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주인의 뒤를 따라, 나와 친구가 수건으로 머리나 옷을 닦으며 들어온다.

나의 머리에는 사슴처럼 뿔이 있다.


주인 : 자, 여기가 해오름방. 열쇠 받아요.

나 : 감사합니다.

주인 : 그래도 어떻게 용케들 도착하셨네. 다른 사람들은 진작에 핸들 꺾어서 집에 갔는데. 가방도 이렇게 다 젖어서, 안에 있는 것들 괜찮나 모르겠네요. 확인해보고 옷들 다 젖었걸랑 1층 세탁실에 있는 건조기 써요. 4분에 500원인데, 젖은 옷 입는 것보단 500원 쓰는 게 낫지.

나 : 네에.

    

천둥이 크게 친다.


주인 : 무슨 비가 이렇게 억세게 오는지. 전부 떠내려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편히 쉬고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주인, 방을 나간다.

나와 친구, 의자에 털썩 앉는다.


나 : 죽는 줄 알았네.

친구 : 나도. 비 온다는 말 없지 않았냐.

나 : 일기예보 믿지 말걸.

친구 : 안 맞는 것도 정도가 있지. (옷을 짜며) 이것 봐, 물 나오는 거. 내일은 그치겠지?

나 : 제발. 여행 와서 숙소에만 있는다고? 오바야.

친구 : 오바지. (나를 보더니) 야, 너 머리. 뿔에 걸렸다.

나 : 아오. 비 올 때마다 이 지랄이야.


친구, 침대 옆 선반에 있던 거울을 나에게 건넨다.

나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진다.


친구 : 나 먼저 씻을까?

나 : 응. 나 이거 먼저 풀어야 돼.


친구, 캐리어 가방을 연다.


친구 : 와.

나 : 왜. 가방 안에 다 젖었어?

친구 : 아니, 살았어. 다행이다. 나 이거까지 젖었으면 쓰러졌다.


친구,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 쪽으로 간다.

나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마저 정리한다.

 

나 : 더럽게 안 풀리네. (엉킨 머리가 다 풀린다. 나는 고개를 이쪽저쪽 돌려가며) 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으로 캐리어 가방에 묻은 물을 꼼꼼하게 닦아낸다.

그리고는 가방을 열고, 옷가지와 물건들을 살핀다.


나 : (캐리어 가방 안에서 옷을 꺼내며) 조금 눅눅한 것 같은데.


나는 옷과 갈색 병을 가지고 테이블로 간다. 옷의 한쪽을 의자에 걸치고 다른 한쪽을 테이블에 걸친다. 테이블과 의자는 순식간에 건조대가 된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갈색 병에 든 오일을 뿔에 바른다. 마사지하듯.


마사지가 끝나면, 나는 방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핀다. 베개를 뒤집어 보기도 하고, 냄새가 나진 않는지 코를 대보기도 하고. 탈취제를 뿌리기도 한다. 침대에서 테이블까지 방에 있는 모든 것을 살피고는, 침대 옆으로 굳게 닫힌 보라색 커튼을 걷는다. 커튼을 걷자,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나온다.

나는 놀라서 주저앉는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벽에 걸린 뿔을 만진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난 뿔을 만진다.

나는 보라색 커튼을 쳐서, 벽에 걸린 뿔을 가린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는, 보라색 커튼을 걷는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뿔 모양의 장식.

벽에 걸린 뿔 사이로 나의 얼굴이 비친다. 마치 거울에 얼굴이 비치듯. 나는 흠칫 놀란다. 이것은 나의 상상이다.


어디선가 톱으로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소리가 커질수록 벽에 비친 나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뿔을, 머리를, 온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자신을 조여오는 무언가를 치우려는 것처럼.

 

친구 : (화장실에서 나오며) 아 시원하다. 우리 맥주 한잔할까?

나 : ….

친구 : 뭐해, 거기서.

나 : (뿔을 가리킨다) ….

친구 : 웬 뿔이야? 사슴뿔인가.

나 : 모르겠어.

친구 : 진짜야 이거? 가짠가? (벽에 걸린 뿔을 두드려 본다) 오, 진짠가 본데. 나 이런 거 실제로 처음 봐, 대박!

나 : ….

친구 : 왜?

나 : 뿔이잖아.

친구 : 아. 나, 지금 좀 촌스러웠나?

나 : 아니 그게 아니라, 뿔이 잘려서 걸려있잖아. …무섭다고.

친구 : 아아. (나와 벽의 뿔을 번갈아 가리키며) 아아! 야 이건 사슴뿔이지 어떤 미친놈이 사람 뿔을 걸어놔.

나 : 나가고 싶어.

친구 : 엉?

나 : 여기서 못 자겠어. 근처에 다른 숙소로 가자. 펜션도 좋고, 호텔도 좋고. (짐을 싼다)

친구 : 왜 그래. 사슴뿔이잖아.

나 : (계속 짐을 싸며) 모르지. 사슴뿔인지, …사람 뿔인지.

친구 : 크기도 색깔도 네 머리에 있는 거랑 완전 다르잖아.

나 : ….

친구 : 거울 봐봐. 다르다니까. 내 주변에 뿔 있는 애들 너 말고도 여럿 있거든? 근데 걔네들 뿔도 다 안 저런데. 이런 건 뿔 있는 사람이 더 잘 아는 거 아닌가.

나 : 사슴뿔 자르는 사람이 사람 뿔 자를 수도 있는 거야.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 몰라?

친구 :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나 : 억지? 말 똑바로 해.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친구 : 다 옛날 일이잖아. 그리고 이거 사장님이 직접 자른 건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르잖아. 뭐 어디 영화에서 보고 멋있어서 샀을 수도 있고.

나 : 나는 영화에서 저런 소품 나올 때마다, 불쾌해서 극장 나왔어.

친구 : (한숨) 비도 오는데 저 짐을 들고 어딜 나가.

나 : 택시 부름 되잖아.

친구 : 오겠냐 이 시간에.


천둥이 친다.


친구 : 봐. 이런 날엔 택시 기사들도 집에 있어.

나 : 그래서 여기 계속 있겠다고?

친구 : 잠깐만, 잠깐만. (나를 데리고 침대로 오며) 앉아봐봐, 여기 앉아봐봐.

나 : 나 옷 안 갈아입었어.

친구 : 괜찮아 뭐 어때.

나 : 싫어. 더러워.

친구 : 그러면, (자신의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침대에 깔며) 됐지? 앉아봐봐. 지금 여기 주변에 뭐가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 아까 한 손으로 캐리어 끌고 한 손으론 우산 들고 그랬던 거 생각해봐. 너 막 옷에 빗물 떨어져서 찝찝하다고 그랬잖아. 운동화도 다 젖었어. 저 척척한 걸 신고 걸을 걸 생각해봐. 아흐 찝찝해. 그리고 너 다시 나가면, 이거 머리 뿔에 엉켜서 또 한참 풀어야 된다. (이불 안으로 몸을 넣으며) 우리 이미 돈도 다 냈고. 다리도 너무 아프고 어깨도 빠질 것 같고. 새로운 숙소 찾겠다고 모르는 곳을 뺑글뺑글 돌기도 그렇잖아. 그랬다간 우리 병나서 내일 아무것도 못 해. 내 말 듣고 있어? 뭐해?

나 : 근처에 숙소 뭐 있나 보고 있어.

친구 :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못 보게 막으며) 에헤이 진짜.

나 : 못 자겠단 말이야. 이상한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친구 : 바람 소리야.

나 : 내가 바보냐 그것도 구분 못 하게.

친구 : 지금도 나?

나 : (고개를 젓는다)…

친구 : 놀란 거야. 아까 저 뿔 발견하고서.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뿔이 뽝 나오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 나도 아까 버스에서 천둥 번개 치기 시작할 때 미치겠더라니까. “이러다 버스 전복되는 거 아니야?” 이러면서 별의별 생각 다 하고. 심호흡해. 지금 너무 흥분했어. 숨 크게 쉬면서, 괜찮다, 별거 아니다.

나 : ….

친구 : 그리고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내가 지켜줄게! 너 알지? 나 요즘 복싱 배우는 거. (일어나서 자세를 취하며) 원, 투. 원, 투.


갑자기, 쿵-쿵-쿵-. 누가 방문을 두드린다.

친구, 놀라 자빠진다.


나 : 퍽이나. (문을 향해) 누구세요?

주인 : (소리로만) 주인인데요. 아직 안 자시면, 좀 들어갈게요.

친구 : 잠시만요.


친구가 문을 열자, 주인이 방으로 들어온다. 주인이 손에 든 나무 쟁반에는 소주잔 2개가 놓여있다.


주인 : 이것 좀 들어요. 오늘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고생들 하신 것 같아서.

친구 : 뭔데요?

주인 : 이게 아주 귀한 술인데요, 이거 한잔하면은 온몸에 스르르 퍼지면서, ‘와따’야.

친구 : 감사합니다.


친구, 곧바로 술을 들이킨다.

나는 마시지 않고 잔을 들고만 있는다.


친구 : 와. 이거 죽이는데요.

주인 : 그쵸? (나를 보며) 왜 안 마셔요. 술 못하나?

나 : 아…, 네. (친구에게) 마실래?

친구 : 오, 땡큐. (원샷한다)

주인 : 이 친구만 계 탔네.

친구 : 잘 마셨습니다. 아, 오신 김에 이거 하나만 여쭤볼게요. 저 뿔, 직접 자르신 거예요?

주인 : 왜요.

친구 : 이 친구가 너무 무서워해서. 사슴뿔 맞죠.

주인 : (씨익 웃으며) 무슨 뿔 같은데?

친구 : 에?

주인 : 사람 뿔일까 봐? 사람 뿔 잘라봐야 뭐해. 돈이 되길 하나 몸에 좋길 하나. 감옥이나 가지. 사람 뿔은 관상용입니다.

친구 : 사장님도 참.

주인 : 우리가 옛날에 사슴 농장을 했걸랑. 농장 정리하면서 기념 삼아.

친구 : 그럼 여기가 사슴 농장이었어요?

주인 : 예. 딱 이맘때쯤이었죠. 사슴뿔 자르는 게. 그걸 절각이라고 하는데, 절각 철이 되면 주말마다 두, 세 마리씩 사슴뿔을 자르는 거야. 그때 사람들이 와서 보기도 하고, 녹용도 사 가고, 사슴피 시음도 하고, 뭐 그랬어요. 옛날 일입니다. 요즘은 사슴뿔 말고 다른 걸 자르지.


나는 표정이 굳지만,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친구 : 뭘, 자르시는데요?

주인 : 이 쟁반. 이거 내가 나무 잘라서 만든 거야. 요즘 나무 도마 많이들 쓰시잖아. 그런 것도 만들고. 공방에서 일일 체험 같은 것도 하는데, 내일도 비 와서 나가기 어려우면 공방 와서 일일 체험 하셔도 좋고. 재료비만 내면 다 가르쳐 드려요. 집에 갈 때 이런 쟁반 하나 가져가면 얼마나 좋아. 기념도 되고.

친구 : 아, 그러면 아까 들리던 이상한 소리가.

주인 : 소리가 났어요? 공방이 좀 떨어져 있어서 여기까진 안 들릴 텐데. 비가 와서 그런가. 아무튼 쟁반 이거 놓고 갈 테니까, 보시고 한번 생각 좀 해보세요들. 일일 체험 없이 그냥 요것만 팔기도 해요. 카드 결제도 되고.

친구 : 아, 네에.

주인 : 아휴, 녹용주 한 잔씩 준다고 와서 시간을 너무 뺏었네. 그러면 푹 쉬시고

나 : 이게 녹용주에요?

주인 : 예. 몸에 좋아요. 그 쪽한텐 좀 그런가?

친구 : 술이 두 잔 들어갔더니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네요.

주인 : 그래, 그래. 쉬어야지. 그러면 내일 봅시다. 쉬세요들.

친구 : 들어가세요.


주인, 방을 나간다.     


친구 : 사장님이 짓궂으시네.

나 : 기분 나빠. 내 뿔만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거 봤지? 일부러 저런 거야.

친구 : 네가 너무 겁먹어 하니까 더 놀리는 거야.

나 : 그리고 녹용주? 미친 거 아냐. 그런 걸 왜 줘? 반응 보고 영상이라도 찍게? 사슴뿔 먹는 뿔 달린 인간 뭐 이런 거? 미리 말 안 한 것도 존나 음흉해.

친구 : 오바야. 좋은 마음으로 주신 건데.

나 : 다른 데 갈래. 진짜 여기 못 있겠어.

친구 : 왜. 다 밝혀졌잖아. 저 뿔은 사슴 농장 하던 때 뿔이고, 아까 들린 이상한 소리는 공방에서 나는 소리고.

나 : 어쨌든 뿔을 자른 사람이기는 하잖아.

친구 : 이제는 안 자른 다잖아.

나 : 어떻게 믿어.

친구 : (놓고 간 도마를 보여주며) 자, 이게 증거야. 아니면 가서 공방 보여달라고 하든지. 같이 가줘?

나 : 함정이면 어떡해.

친구 : 뭐?

나 : 내 뿔 자르려고 꾸민 계획이면 어떡하냐고!

친구 : …야, 너 그 말은 나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잖아.

나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친구 : 나도 의심해? 그럼 믿지도 못할 사람이랑 여행은 왜 왔어?

나 : ….

친구 : (침대에 누우며) 갈 거면 너 혼자가. 난 못가.

나 : 미안해. 말이 잘못 나왔어.

친구 : 내가 무서워서 샤워도 못하겠네. 불 꺼. 나 자게.


친구,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다.

나는 그런 친구를 보다가, 커튼을 닫고 불을 끈다. 침대에 어정쩡하게 걸터앉는다.

이불 안으로 몸을 넣으려는데, 다시 톱으로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커튼을 걷는다. 벽에 걸린 뿔 사이로 나의 얼굴이 비친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친구를 본다. 그리고 다시 뿔 사이로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울 것 같은 얼굴이다.    

 

막.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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