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만
일찍 세상을 뜬 형 이름이다. 교사의 꿈을 꾸던 형은 대학생 때 강남 유명 학원에서 보조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정말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스타강사가 되었다. 형이 수업시간에 가르친 내용들이 여러 대학의 논술시험에 적중되어 조선일보 사회면에 ‘대문짝’만 한 기사가 나갔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부터 며칠간 집의 전화통에 불이 나던 것을.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는 말을 우리 집에서 실감할 줄이야. 그래서 형은 이른 나이에 국어, 논술에서 소위 전국 1타 강사가 되었다. 그 유명세로 사회탐구 손주은 선생님, 과학탐구 이범 선생님과 함께 메가스터디 창립 멤버가 되어 부사장 직함을 달기도 했다. 메가스터디 상장 전에 세상을 떠서 그 영화는 크게 못 누렸지만 형이 애정을 가지고 일했던 회사이니 지금이라도 알면 흐뭇해할 것이다.
형과 나는 우애가 깊은 형제였다. 2살 터울 나는 남자 형제답지 않게 자라면서 싸운 적도 없다. 각자 결혼 후에도 자주 만나 서로 하는 일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형이 내게 물었다.
“애들이 나에게 질문했을 때 당황스러울 때가 언제인지 알아?”
“아니 형처럼 잘 나가는 강사가 두려울 질문이 뭐가 있어?
“애들이 만약에 “선생님 시는 어떻게 공부해요?, 논술은 어떻게 써야 해요?”라고 물으면 밤새워서 애들에게 답변해 줄 수 있지”
“그런데?”
“그렇지만 아이들이 “선생님 저 나중에 뭐 해 먹고 살까요?”, “선생님 저 나중에 뭘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으면 해 줄 말이 없어. 사실 점수 1,2점 올리는 것보다 인생에 저런 일이 중요한 거 아닌가? 나름 잘 나간다는 나도 이리 해줄 말이 없는데 애들은 대체 저런 고민을 누구랑 나누지?”
진학보다 중요한 것이 진로인데 진로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조언을 주는 교육이 없다는 이야기를 형과 나눈 것이 내 인생을 진로교육에 들게 한 시작이었다. 외국계 경영컨설팅 회사에 다니던 나는 회사의 지식관리 시스템을 통해서 다른 나라 사례들을 찾아보니 진로교육은 다른 나라도 빈약하긴 마찬가지인데 선진국의 경우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개발도상국은 취업난으로 인해 진로교육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나누던 2001년 당시는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치고는 좀 앞선 애매한 상황이라 나중에 기회 되면 이런 일을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에서 멈췄다. 9.11 테러가 발생하고 며칠 뒤 형은 원인불상 병으로 세상을 떴다. 형과 나중에 같이 해보자던 진로교육은 나에게 형의 유지처럼 다가왔고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박사과정 학업을 멈추고 창업을 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대화하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틀렸다. 그건 날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조.진.만” 세 글자는 언제든 나를 눈물짓게 한다. 그리고 내 진로교육 인생의 시작을 뜻하는 세 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