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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면 Oct 11. 2017

영화 남한산성(The Fortress) 후기

결국 민들레꽃은 피었지만...

  명절이 겹친 사상 최대의 연휴라는 개봉 시기, 병자호란이라는 묵직한 역사적 소재, 그를 바탕으로 한 김훈 작가의 원작 소설, 이 무게감을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들까지. 영화 남한산성은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요소를 고루 갖춘 영화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기에 결말로 가는 과정은 다양할 수 있어도 영화의 비극적 결말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눈여겨보았던 부분, 영화를 본 뒤 생각했던 부분을 조금 정리해 보았다.



1. 허구성


  영화 남한산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이 원작이다. 소설이라는 카테고리가 100% 사실만을 다룬다 하기에는 어렵겠지만 역사라는 소재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다른 소재에 비해 허구성은 낮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소재는 허구성이 높으면 안 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역사를 잘못 각색할 경우 큰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황후덕혜옹주가 그랬고 군함도 역시 그랬다.

  그런 점에서 이번 황동혁 감독남한산성은 '세대를 불문하고 함께 공감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기획 의도를 잘 살렸다. 허구의 인물도 있고 실제 역사와 영화 속 등장인물의 행보가 상이한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허구적 요소들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거나 미화시킨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참담한 역사를 담담히 풀어냈다는 느낌이다. 오랑캐와 맞서 싸우는 화려한 액션 활극을 원한다면, 다른 퓨전 사극 같은 걸 찾아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2. 정의란 무엇인가?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과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추구하는 충심에 대한 방향이 다른 것이 이 영화의 주된 갈등이다. 그러나 이 둘 외에도 대의를 말하는 김상헌, 누가 지배하던 그저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배를 곯지 않기만을 바란다는 대장장이 서날쇠(고수 분) 간의 견해 차이처럼 극이 진행되는 동안 인물 간의 갈등은 끝없이 발생한다.


  의견을 주장하는 각자의 신념이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에, 그것이 관객에게 전해지기에 그 갈등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그것이 청으로 가서 앞잡이...역관 노릇을 하는 정명수(조우진 분)의 조선 사회에 대한 적대감일지라도, 우리가 보기에 너무도 당연해서 답답함을 느끼는 무관 이시백(박희순 분)과 영의정 김류(송영창 분)의 갈등이더라도 말이다.

  이처럼 영화는 역사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되 시종일관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갈등을 보여준다. 마치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미 약 400년 전의 이야기이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한들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설령 이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아마도 이에 대한 정답은 없겠으나, 분명 의미 있는 고민이 될 것이다.



3. POTC(Player of the Crisis)


  영화 속에서 위기를 고조시키는, 나쁜 의미에서의 '최고의 플레이' 였던 영의정 김류와 인조(박해일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왜 청나라가 아니고 이 두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김류는 그 유명한, 외부의 적보다 무섭다는 '내부의 적'이다. 더 무서운 건 자기가 내부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김류는 이괄, 이귀 등과 함께 인조반정의 주동자로서 인조 즉위 후 1등 공신이 되며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 속 평가도 그렇고 영화 속에서도 그렇고 일관되지 않은,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으로 삼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주제에 뼛속까지 사대부라고 실리보다 명분을 추구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김류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장이 있는데, 내용은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다만 화가 나고 답답할 수 있으니 미리 사이다나 탄산수 같은 걸 준비하시면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뭔가 구기거나 후려칠 거라도...


  최명길을 강력하게 비판하다가도 이후 그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는 등 영화 속에서 김류의 다양한 말 바꾸기를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주변 친구 중 한 명은 김류의 적은 김류, '김적김' 이라고 평했을까. 문득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해 뱉은 말을 주워 담거나 모른 척하는 내부의 적, 오늘날의 그분들이 떠올랐다. 더불어 배우 송영창은 이 배역을 통해 꽉 막힌 꼰대가 권력을 쥐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놀랍도록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송영창의 동공이 열일했다는 점에서는 영화를 본 모두가 공감하리라.

  인조도 사실 크게 다르진 않다. 영화에서는 일련의 과정들이 생략되어 있지만 애초에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만큼 공신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원래 성정이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조가 한 가장 큰 오판 두 가지는 공신 선정과 외교정책이 아닐까 한다. 첫 번째는 이괄로 하여금 이괄의 난을 일으켜 조선 북방의 정예 병력을 소모하게 되는 원인이, 두 번째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과 반대로 행동함으로써 저물어가는 명을 사대하고 후금을 자극해 정묘호란&병자호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김류보다, 청나라 군대보다 더 나쁜 건 무능한 지도자, 인조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평가도 그렇고 영화 속에서도 그렇다. 말로는 백성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산성에 피신한 백성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애초에 알려고나 했었을까? 영화 속에서 표현된 건 실제 역사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이 무능하면 개인이, 집단의 우두머리가 무능하면 집단이, 나라의 우두머리가 무능하면 나라 전체가, 백성이 피해를 본다.

  인조의 무능함은 '아껴서 분배하되, 너무 아끼진 말게 하여라.'라는 대사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침도 제대로 안 주고서 고압적인 자세로 두루뭉술한 업무 지시만 하던 예전 직장의 상사가 문득 떠올랐다. 부디 잘~살고 계시길.


  영화는 소설처럼 총 11개 장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가마니와 말고기' 장에서 인조의 무능함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악당보다 더 나쁜 게 위선자다. 감독이 의도한 바이겠지만 오늘날 뉴스에서, 직장에서,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더 씁쓸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4. 사망 플래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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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썼던 영화 밀정의 리뷰에서 다룬 적이 있는 내용이다. 사망 플래그란 이야기 속에서 죽음을 맞는 등장인물들이 죽기 전 곧잘 하는 말이나 행동들을 통틀어 이르는 단어인데, 이에 대한 개념을 몰랐을지라도 각종 드라마나 영화로 단련된 우리는 은연중에 '어? 쟤 쟤 저거 저러다 죽겠는데?'라는 예측 아닌 예측을 하게 되고, 대체로 그 예측은 맞아떨어지곤 한다.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 등 창작자의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반전이 있을 수 있는 허구 속 이야기와는 달리 남한산성이 다루는 것은 처절한 우리의 역사이다. 사망 플래그는 이러한 처절함이나 안타까움을 배가시키는 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 점들이 너무 눈에 잘 보였기에 이미 알고 있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면서 혼자 주먹을 몇 번씩 쥐었다 폈다.



5. 배우 박희순, 그리고 이시백


  배우 박희순은 1990년 데뷔 후 현재까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을 넘나들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베테랑 배우이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이런 그에게 '재발견'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으며 실례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날카로워 보일 수 있는 인상이지만 그 덕분에 스크린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를 뿜어낼 수 있고, 웃을 때는 또 인상이 부드럽게 바뀐다. 그런 밑바탕에 오랜 경험으로 얻은 훌륭한 연기 내공이 더해진 덕분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역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여담이지만 사실 박희순은 남한산성을 찍기 몇 년 전, 분위기는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혈투(2010년 作)라는 이름의 영화였는데 영화가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망했기에 어쩌면 박희순에게 이번 남한산성은 잠시 자신의 흑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박희순이 맡은 '이시백'이라는 역할은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매력적인 배역이라고 평했다. 고립된 남한산성 속에서 뛰어난 무력과 인품을 지니고 있어 신뢰감을 뿜어내는 존재였다는 점, 관객들에게 암적 존재인 김류와 대립했다는 점 등 여러모로 매력적인 배우가 매력적인 배역을 맡았다 할 수 있겠다.


  역사 속의 실제 이시백은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방비를 맡았던 남한산성 서쪽에 적의 야습이 있었을 때 갑옷도 입지 않은 맨몸으로 맞서 싸워 물리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영화 속 모습이 아주 허구는 아닌 것 같다. 교과 과정에서 고전문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이시백이라는 이름이 좀 더 익숙할 수도 있을 것인데, '박씨부인전'이라는 조선 후기 군담 소설에도 이시백이 등장한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오니 한 번쯤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총평]


  총 11개 장으로 영화를 나누어 각 장면 간 전환을 자연스럽게 했고,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은 점이 좋았다. 가상 인물인 칠복이(이다윗 분), 나루(조아인 분)를 이용해 극적 요소를 배가시켰고, 나루가 김상헌에게 이야기하던 민들레꽃은 민초들의 평화를 의미하며 마지막 장면과 함께 여운을 남겼다.


  군함도와 똑같이 아픈 역사를 다뤘지만, 표현 방식은 천지 차이다. 몇 개월 전 군함도를 봐 버린 눈을 정화할 수 있는 웰메이드 사극 영화라고 감히 평가해본다. 더불어, 소설이 원작이기에 소설과 실제 역사가 어떤 점들이 다른지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며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훌륭했지만 항상 찬란하지만은 않았던, 아픈 우리 역사도 바로 알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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