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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Feb 05. 2024

오늘도 분노하는 당신을 위로하며

당신은 한 마리의 아름다운 돌고래일지도 모른다

프리다 칼로

 나는 가장 아름다웠던 여류화가로 단연 프리다 칼로를 뽑는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 자체도 무척이나 아름답고 푸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죽음의 원인은 흔히 폐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지막 일기에서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고 쓰여 있었다는 점. 죽기 일 년 전 한 쪽 다리를 무릎까지 절단하고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약물 과용에 대한 정황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자살 가능성이 제기되곤 한다. 하지만 감히 짐작컨데 나는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녀는 정말이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프리다는 정말이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사고 당한 순간을 그린 프리다의 작품


 프리다에게 고통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밝고 명랑하다는 낭랑(朗朗) 18세. 소녀 프리다는 사고를 당한다. 달려오던 전차가 그녀가 탄 버스의 허리를 박은 대형 사고였다. 충돌과 동시에 그녀가 잡고 있던 쇠봉 손잡이는 우그러져 쓰러졌고 공중으로 떠오른 그녀의 몸을 관통한다. 척추부터 골반, 허벅지까지 쇠봉이 꽂힌 그녀의 모습에 어떤 의사가 생사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의사들은 그녀가 살아난게 기적이라고 했다. 목숨을 건졌지만 걷지 못할 것이라 봤다. 하지만 그녀는 강했다. 수차례의 수술, 9개월 간의 전신 깁스. 그 기나긴 과정 끝에 그녀는 살아나 자신의 발로 뚜벅뚜벅 걸어내기에 이른다.




침대에 누워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 프리다의 아버지는 사진작가로 이런 장면을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


 

9개월 동안 전신 깁스를 하고 누워 숨만 쉬는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나라면 이런 삶이란 관 안에 누워있는 것과 하등 다를 없다고, 차라리 죽는게 나을것이라 생각했을 것같다. 하지만 프리다는 그런 생각만 하고 누워있기 보다 그림 그리기를 ‘선택’했다.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끊임없이 자신을 재확인하고 고통을 토해냈다. 아픔의 깊이만큼이나 그림은 솔직했고 천연했다. 그림을 평가해달라는 프리다에게 멕시코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는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성이 전해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프리다와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


 살아남은 그녀는 멕시코 역사라는 격정적인 파도에서 헤엄쳤다. 멕시코는 당시 엄청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프리다는 공산당원이었던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결혼하며 정치 행보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서양 화풍의 영향 받지 않은 독자적인 멕시코 여성 화가로서 입지도 굳혀간다.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바람둥이였던 남편 리베라와 이혼과 재결혼을 반복하며 살기도 했다. 그녀 삶에서 낭만과 고통은 반복되는 이랑과 고랑처럼 가득했다. 마흔 일곱 해의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만약 그녀가 사고를 당하고 침상에 누워 절망만 했다면 어땠을까. 붓을 들지 않았다면, 그 고통을 화폭에 담아내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됐을까. 서양 화풍도, 남성 중심적인 사상에도 물들지 않은 빳빳하고 날 것의 프리다만의 페미니즘 멕시코 미술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멕시코의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던 화가 남편의 영원한 뮤즈가 되어주지 못했으리라. 평생을 척추에서 전해오는 고통을 이고 산 프리다 칼로. 그녀의 치열했던 삶은 '평화'라는 그녀 이름의 뜻과 배치되어 역설적이면서도 의미를 가진다. 프리다는 치열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평화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치열했던 삶은
'평화'라는 그녀 이름의 뜻과 배치되어
역설적이면서도 의미를 가진다. 



 누구나 삶 앞에 주저하는 순간이 온다. 실연에, 실패에, 슬픔에. 하지만 사실, 주저함은 삶을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 마음의 반증이다. 그간 이틀에 걸러 나오던 묻지마 칼부림 뉴스가 이젠 하루 걸러 포탈 메인을 장식한다. 사회에 대한 분노를 무기 삼아 사람들의 삶을 해치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다. 주저없이 내지르는 칼날 속에선 수없이 삶 안에서 고민했던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도 담겨있는 듯하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 여기는걸까.  인생이라는 지독한 꿈을 깨고 싶은 이들이 자꾸만 늘어간다. 누군가 삶은 물 속에서 숨을 꾹 참고 있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숨이 금방 넘어갈 것 같아도 손에 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해도 포기하진 말자. 어쩌면 당신은 한 마리의 아름다운 돌고래인지도 모르니까. 프리다처럼 참아내면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펼쳐질지 모르니까. 치열하게, 프리다처럼. 그 이름처럼… ‘평화’롭게 살아내자.





* 카더가든 (Car, the garden)의 '그대 작은 나의 세상이 되어'를 들으며 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urHW2kBq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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