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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Jan 07. 2022

제도적 모성애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자의 몸부림

천천히 가는 8년 차 엄마의 성장기

  

(@pixabay)

새해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하는 엄마들이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던진다는 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돌봄 교실은 붙어서 한시름 놓았지만, 여름방학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찔하다. 이런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아이 유치원 방학인 12월 마지막 주를 꼭 붙어서 지낸 탓일까? 새해 첫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 마음이 심란했다. 한겨울임에도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그러나 아이가 외출을 거부하는 바람에 치킨과 생맥주를 배달시켰다. 500잔에 막 따른 생맥주를 들이켜고 싶었던 나의 바람을 좌절시킨 아이에게 좀 서운한 마음이 들어 아이가 제대로 먹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 정도 굶는다고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나 싶어 나의 심란함만 챙겼다. 그렇게 배달된 맥주 500cc에 마음을 달래고, 몇 달 전에 사두었던 ‘레고’를 개봉했다. 기껐해야 10분, 30분 정도의 쪽 단위 시간밖에 없는 일 하는 엄마에게 성인용 레고를 조립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사치다. 그러나 그날은 어쩐지 그런 시간을 꼭 갖고 싶었다.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은 시간. 마음으로 “엄마 역할을 파업”을 하고,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집중해서 블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이.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 방문이 빼꼼 열리더니 아이가 나와 화장실로 휘청휘청 걸어가 속을 게워냈다. 저녁으로 먹은 치킨과 콜라의 흔적이 그대로 나왔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나도 모르게 아이 등을 두드리며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함께 자리에 누워 배를 쓰다듬어주던 내 손을 잡은 아이는 말했다. “엄마, 나는 치킨 말고 밥이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오늘은 요리를 하기 싫다고 해서 참았어. 그런데 나는 따뜻한 밥이 먹고 싶었어….”



나는 또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나의 욕구는 항상 아이들의 욕구와 엇갈렸고, 그리고 항상 그들의 욕구에 밀렸다. 15분간만이라도 아기적이고 평화롭고 아이들한테서 떨어져 있으면 훨씬 더 잘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분 간만이라도! 그러나 마치 우리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실이 팽팽하게 놓여있어서, 만약 내가-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견고하게 그어진 우리의 공동생활을 넘어서는 영역으로 움직인다면, 아이는 버림을 받았다고 격렬하게 느낄 정도로 그 연결이 깨어지는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이 원, 우리가 살았던 이 자기장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에 얽매이고 전통에 매여있는 어머니라는 형태에 나 자신이 내던져지고 나니 그 형태가 파도처럼 불가항력적으로 여져졌다. ….. (중략) 내가 아이한테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 아이들이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던 진정한 욕구가 분명히 있었다. 아이는 나라는 사람을 통해 따뜻함, 상냥함, 지속성, 견고성이 여전히 자기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독자성, 그의 엄마로서 이 세상에서의 나의 유일성 때문에 아이는 어떤 사람이 만족시킬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요구를 했고, 끊임없이, 무조건적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어떤 때는 한밤중에도 사랑해야만 이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22~23쪽)



나는 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을까?



케이트 밀레의 <성 정치학>과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을 읽으면서 선사 시대 이후 인류의 역사가 여성의 권위와 권한이 축소되는 과정이었고, 자본주의와 결탁한 가부장 주의 하에 여성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은 ‘여성성’과 ‘모성’ 임을 알게 되었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제도로서의 모성’이라고 표현한, 우리가 흔히 ‘어머니’라고 하면 상상하는 어떤 모습은 가부장제의 필요에 의해 창출된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이에게 미안했다.





# 임산부 시절

출산 예정일 2주 전까지 만삭의 배를 이끌고 출근을 했다. 야근도 회식자리도 빠지지 않아 광역버스에 몸을 싣고 한 시간 넘게 서서 퇴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적인 일로 배려를 요구하는 일이 직장인으로서의 의무 태만으로 생각되었다. 직장 생활에서 배려는 쉽게 배제로 이어진다. 나로 인해 주위 동료들에게 임신한 여성과 일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임신은 지극히 사적인 일이었고, 일신 상의 변화가 업무에 영향을 주지 않길 바랐다. 출산휴가를 가는 나에게 잘 쉬고 오라고 인사를 하는 남성 동료들에게 출산과 육아는 휴식이 아니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임신을 했지만, 임신한 사람이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 임신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나는 엄마가 될 마음의 준비가 된 증거라고 생각했었다.

임신한 사실이 분명하게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나는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 심지어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에게조차 받게 되는 그러한 느낌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후광과 같았다. 그 안에서의 회의와 두려움, 불만은 모두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같은 책 25쪽)

그러나 에이드리언 리치가 말했듯이 그것은 단지 사회적 승인에 대한 즐거움에 가까웠다. 여러 가지 통과의례를 해치울 때마다 느꼈던 만족감 같은 것 말이다. 특히 사회에서 여성에게 기대되는 섹슈얼리티에 열등생인 내가 여성으로서 해야 할 일(결혼과 임신)을 수행하고 나니 드디어 제대로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 출산 후 신생아 돌봄 시절

남편이 출근하면서 닫힌 현관문은 남편이 퇴근할 무렵까지 열리지 않았다. 오로지 아이와 나 단둘이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아이의 생존에 직결된다는 압박감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돌봄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나를 괴롭히던 것은 모유 수유였다. 아이에게 처음 젖을 물리기 전까지 모유 수유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완모 하는 엄마를 칭송할 뿐 아무도 나에게 모유 수유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내 젖을 물리려고 할 때 아이는 목에 힘을 주고 세상 떠나가라 울었고 그나마 만족스럽게 먹지 못해 30분마다 배가 고프다고 울어댔다. 반면 분유를 먹을 땐 배불리 먹고 만족스럽게 잤다. 젖을 물릴 때에는 내가 무능력해서 아이를 굶기는 것 같았고, 분유 수유를 할 때는 몹쓸 엄마가 된 것 같았다. 혼합 수유가 오래되면 유두혼동으로 아이가 수유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조언에 나는 결국 왕분을 선택했고, 아이와 실랑이는 없어졌다. 아이는 4시간마다 정해진 분량을 먹고 규칙적으로 잠을 자고 똥도 잘 쌌다. 그러나 분유를 탈 때마다 나는 부족한 엄마라는 죄책감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완모 했다는 엄마들 앞에서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막연하게 아이에게 좋은 엄마는 되고 싶었으나 희생하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어.”라는 엄마의 인생이 고마우면서도 해결하지 못할 숙제처럼 부담이었다. 떡진 머리로 소변을 참아가며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팔목이 으스러지도록 채소들을 다지며 깨달았다.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엄마는 요리사, 주방의 하녀, 세탁부, 가정주부 보모의 역할을 모두 해내도록 요구받는 자리(같은 책, 27쪽)라는 것을.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좋은 엄마상은 “나를 내려놓고 희생하는 엄마” 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보였다. 나는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다. 회사는 희생하지 않는 나에게 방패막이되어 줄 것 같았다.

# 복직

입사 때부터 꿈은 퇴사였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언제든 떠나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집중 육아기의 퇴사는 독박 육아 직행 티켓임을 알기에 입주 시터를 고용하고 복직을 했다. 내가 없어도 24시간 아이를 캐어 해 줄 사람을 고용하고 내 월급의 반을 썼다. 돌봄으로부터 도망치는 내가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입주 시터 덕분에 회사에 직접적으로 “아이 때문에…” 혹은 “아이가 아파서…”라는 말을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원한다면 아이가 없는 일 인분의 직장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 한편은 늘 불편했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출근한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은 업무를 대하는 내 태도에 반영되었다. 엄마가 되기 전 나는 대단히 유능한 사원은 아니었지만, 성실한 직원이었다. “이 업무 한번 해볼래?”라는 선배의 제안에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새로운 업무를 할 때 성장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육아휴직 후 복직하고 나서는 “네 해볼게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행여나 누가 일을 더 줄까 없는 사람처럼 숨죽이고 주어진 일만 했다. 새로운 기회가 있어도 내 안의 모성 신화가 나에게 계속 물었다. “ 아침에 자는 모습을 보고 출근하고 아이가 잠들어 있을 때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진다면, 넌 그게 진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럴 거면 아이는 왜 낳았니? 너는 모성애가 없는 거니?” 모든 순간 나는 ‘좋은 엄마’와 ‘성실한 직장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동적인 직장인으로 변해갔다. 나는 나쁜 엄마이며 불성실한 직장인으로 나 스스로를 폄하하며 자책의 시간이 늘었다.

# 다시 지금..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하는 워킹맘 

새벽녘에 토를 하고 겨우 잠들었던 아이는 다음 날 수척한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엄마 나는 어제 토해서 오늘 유치원에 못 갈 것 같아요. 엄마 재택 하니까 말 걸지 않고 혼자 조용히 놀게요. 집에 있게 해 주세요.” 나의 죄책감을 귀신같이 감지하고 거부할 수 없는 멘트로 나를 설득한다. 나는 아이에게 지고 만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지 않음으로써 지난밤 죄책감은 면죄부를 받았으나, 일하는 내내 ‘엄마, 엄마, 엄마”라는 아이의 부름에 시달려야 했다.



9 to 6 매인 몸으로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아이에게 그러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재택근무 중이기 때문이다. 2년 넘게 재택근무하면서 요령이 생긴 것도 있고,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잔 손이 덜 가는 것도 있어서 아이가 집에 있어도 업무 진행에 큰 지장은 없다. 아이는 엄마가 정해진 시간 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느라 본인과 놀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반쯤은) 이해한다.

재택근무는 집 근처 학원가와 초등학교에 코로나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말미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이를 하루 이틀 더 집에 데리고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하며 지난밤 "엄마가 아닌 나"이고 싶었던 순간을 욕망했던 내가 품었던 미안함을 조각시킬 수 있었다. 재택근무는 실제로 워킹맘이 가지는 죄책감을 좀 덜어주고 엄마 노릇을 좀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그렇다면 재택근무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제도일까?

직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마음 한편이 불편함은 있었지만 어쨌든 엄마가 아닌 나였다. ( 직장인의 정체성과 직장인이 아닌 나 사이의 분열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그러나 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지금은 매 순간 나는 직장인이며 동시에 엄마다. 기존에는 출퇴근 시간이 모드 전환의 시간이었다면, 지금은 매 순간 전환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토마토를 씻어 아이에게 주고 이메일을 쓴다거나, 화상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아이의 부름에 달려가는 모드 전환 말이다. 대신 동료들과 즐거운 티타임, 머리 지끈거리는 회의를 끝낸 후 산책 같은 시간이 사라졌다. 그렇게 나를 좀 더 갈아 넣고 나서 5분 대기조처럼 언제나 응대 가능한 엄마가 되고 나서야 일을 하며 가지는 불편한 마음이 사라졌다. 아이에게 "할 만큼 했다."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사실 좀 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불편한 마음의 실체는 ‘아이’에게 미안함' 이 아니다. 집에 있고 싶다는 아이를 울리며 유치원에 보냈어도 아이는 또 하루를 잘 보내고 밝은 모습으로 집에 왔을 것이다. 설령 그렇게 억지로 보낸 아이가 감기가 옮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 탓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은 것은 ‘제도적 모성애’를 실천하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의 실천에 가깝다. 제도화된 모성은 여성에게서 지적 능력보다는 모성 ‘본능’을, 자아실현보다는 이타심을, 자아 창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같은 책 46쪽)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하는 죄책감과 불편함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내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실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퇴사할 작정이었다. 아이를 학원 차에 태워, 이 건물 저 건물로 돌리고 싶지 않다. 하교한 아이에게 아이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삶아주고, 놀이터에서 같이 가고 싶다. 빨리빨리라고 잔소리하지 않고 손을 꼭 잡고 시장을 보고, 갓 지은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었다. 아이와 밤에 만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 짧은 것에 아쉬워하지 않고 밝고 따뜻한 햇볕 아래 함께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런 시간들을 통해 내가 진짜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엄마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이라는 시선을 걷어내고 생각해 보니, 내가 세상에 존재하게 한 이 아이와 ‘인간 대 인간’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였다. 분만실에서 아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가졌던 첫 번째 마음은 슬픔이었다. 힘든 세상에 내 의지로 세상에 만들어낸 미안함이 컸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런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절대적인 환대"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강하고 따뜻한 환대를 건네기 전에 나는 먼저 제도적 모성애에 포획되어 있었던 셈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앎과 삶의 간극이 커 입맛이 쓰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회가 주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고 엄마가 아닌 시간을 꿈꾸다 화들짝 놀라 다시 아이에게 사과를 하는 시간은 여러 번 반복될 것이다. 역시 이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 패배감이 들 때쯤 세미나 책 북이 토크에서 정승연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공부하는 것 자체가 실천이라는....

고백하자면 되돌릴 수 없으면서도 모유 수유를 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의 마음을 꽤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아이에게 좋은 것임에도 내가 하기 싫다는 이유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잔병치레할 때마다 그것이 내 탓 같았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사랑>과 <자본주의와 돌봄>이라는 주제로 학인들과 2년 넘게 공부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공부가 실천이라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 계속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미안함을 넘어서서 내가 아이에게 진짜로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고민할 힘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결국 대단한 결론은 없다. 이 혼란 속에서 몸부림치며 계속 살아가는 수밖에. 하나 소박한 기대를 품어보자면, 딸에게 집착하는 엄마가 아니라 "절대적인 환대"를 알려주는, 먼저 삶을 살아가는 "선배 여성"이 되고자 하는 방향성을 잃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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