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서 썼던 글을 2편으로 정리하여 22년 상반기 심야메일 객원필진으로 참여하여 발송했습니다.
어느 이십 대의 취업기
"불합격입니다."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 행정고시 2차 불합격 문자를 확인했다. 모 회사 입사 축하 술자리에서였다.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딱히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기에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갔다. 2학년을 마치고 대부분의 남자 동기들은 군대를 가고, 여자 동기들은 어학연수를 가거나 공무원, 회계사, 기자 같은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공무원 시험을 선택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세 번째 2차 시험 발표를 앞두고 계속 공부를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5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고 해서 공직에 큰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사기업 취직보다 행정고시 합격이 더 능력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 열심히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과외로 모아 놓았던 돈은 진작 다 바닥나고 집에서 받던 지원은 가족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꼭 하고 싶은 일도 아닌데 타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드라마 <그해 우리는> 에서 최웅은 열심히 취업준비를 하는 국연수에게 묻는다.
웅이: 취업을 하고 나면 무엇을 할 거야?
연수: 월급 꼬박꼬박 저축해서 할머니 일 더 안 하게 해드릴 거야.
웅이: 그게 다야? 생활비 벌면서 장학금 안 놓치고 죽어라 공부하고 열심히 사는 거 다 봤으니까. 좀 더 큰 성공에 대한 꿈이 있을 거 아니야?
연수: 그게 나에게는 성공이야.
드라마 속 연수만큼 생활고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정서는 비슷했다.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 없이 해야 하는 일들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밥을 굶거나 차비가 없어 걸어 다닐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밥 먹고 사는 것 외의 여유는 하나도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게 효도였고, 그 후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곳에 취업해서 부모님의 자랑이 되고 싶었다. 공무원 시험을 접고 취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던 때가 스물여섯이었으니 공채 시장에서 여자 나이로는 늦은 축에 속했다. 시험공부만 하다 성과도 없이 애꿎은 시간만 날리고 사기업 취업 시기조차 놓칠까 불안했다. 취업을 하려고 보니 명문대 학벌 외에 손에 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 흔한 인턴, 자격증, 공모전 경험조차도. 700점을 간신히 넘긴 토익 점수와 77사이즈의 옷도 들어가지 않는 몸 외엔 말이다.
취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난 후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었다. 어떤 분야의 회사를 가더라도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니 회계팀이나 기획팀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은행, 건설회사, 중장비회사, 광고회사, 증권회사, 신문사 등에 입사원서를 쓰면서 매일 4시간씩 운동을 했다. 단기간에 몸무게를 감량하고 면접 복장의 옷이 몸에 맞겠다 싶을 무렵 수십 개의 서류 광탈 끝에 몇 군데 면접 기회를 얻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나에게 첫 번째로 "합격입니다."라는 문자를 준 곳이었다. 사실 이 곳에 입사 결정을 고민하게 한 회사가 하나 있었다. 그 당시 본사 위치, 연봉, 사업 전망 등을 생각할 때, 지금 선택한 회사보다 좋았다. 실무 면접 때 인사팀에서 나를 좋게 봤는지 최종 면접 전에 따로 점심을 사주시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회사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실무 면접 당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임원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차피 애 낳으면 그만 둘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 너네 다 금방 그만둘 거 아니야?"
아들을 낳고 싶어서 세 번째 임신을 했던 엄마의 소망이 무색하게 나는 딸로 태어났다. 엄마는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쉬워했지만, 나를 키우면서 "넌 여자이기 때문에 할 수 없어"라는 메시지를 준 적은 없었다. 남동생에 대한 엄마의 과한 애정은 오랜 바람을 이룬 기쁨의 표현이었지 그 때문에 내가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적은 없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계집애들은 중학교 졸업했으면 공장 가서 돈이나 벌어!”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사실 그건 할머니의 여러 가지 시집살이 스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정작 본인의 딸(고모) 대학 등록금을 내놓으라고 거실에 누워 통곡을 할 때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학창 시절 만났던 수많은 자매들은 이미 사회에 진출해 누구보다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터였다. 성별이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너무나 낯설었다.
대기업에서 남성과 동등한 기준으로 여성을 공채로 채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과에서 여학생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99년 정도부터였다. 학과 입학 정원 130명 중 여학생의 수는 94년도에 3명, 98년도에도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대기업에 다니던 여성이 있다면 대다수는 서무 여직원, 비서(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참고)였고, 어쩌다 정직원으로 채용된 경우에도 임신을 하면 퇴직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그 임원 입장에서는 많은 수의 여성 지원자가 낯설었을 것이다. 애써 그의 입장을 이해한다 해도 그의 발언은 불쾌했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했던 그 회사는 현재 아주 싼값에 매물로 나와있다.
나에게 처음으로 "합격입니다."라는 문자를 준, 그래서 입사한 곳은 대기업의 IT 계열사였다. 호텔에서 면접을 보고 저녁식사로 근사한 코스 요리를 먹었다. 합격자 발표 후 회사에서는 여러 가지 이벤트를 만들어서 합격자들을 자주 모았다. 술을 사주거나 1박 2일 스키장에 데리고 갔다. 애써 뽑아 놓은 신입사원의 이탈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때 호텔도 스키장도 처음 가봤다. 여행을 다닐 만큼 화목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던 형편에 지방의 외갓집 방문 말고는 여행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별로 없다. 스물이 넘어 친구들과 다니던 여행의 숙소는 항상 민박집이었다. 그런데 회사에 합격했을 뿐인데 가는 곳이 달라졌다. 회사에서는 자녀를 잘 키워 회사에 보내줘서 고맙다고 부모님 초청행사를 했다. 호텔에서 부모님과 하룻밤을 보내며 쇼를 보고 면접 때처럼 코스 요리를 먹었다. 신혼여행도 제대로 가보지 못했다던 엄마는 딸 덕분에 이런 호강도 한다며 좋아하셨다. 그동안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 같았다.
스키장이 처음 가본 그날 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무거운 보드를 들고서 불편한 자세로 리프트를 타고 높이 올라간 후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며 슬로프를 내려오는 그 과정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보드 타는 게 재미없다고 말하지 못한 채 오히려 즐기는 사람처럼 굴었다. 늘 짬뽕과 자장면만 먹었던 사람은 팔보채와 양장피 중 더 선호하는 요리를 고를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팔보채와 양장피 둘 다 좋아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야 내 결핍을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급자 코스의 슬로프에서 능숙하게 내려와 환하게 웃는 동기들을 보고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없지만 내가 동경하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여유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가진 사람들.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 부러웠다. 부러움은 살면서 내가 외면하고 싶어하던 감정이었다.
모든 결핍은 노력으로 채울 수 있다고 여겼다. 그게 내가 열심히 산 동력이었다. 그러나 사실 세상에는 노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 나는 싫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공에 대한 욕망은 없었을지라도 인정 욕구는 컸던 내게 애써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다가왔다. 무엇에 대한 인정인지에 대해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예? 저 컴맹인데 코딩을 하라고요?
그 당시 IT 회사에서는 비전공자를 채용해 기술 교육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IT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사업의 포인트를 찾기 위해 다양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IT 전공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도 선택 가능한 방법이었을 텐데, 회사는 비전공자를 뽑아 IT 기술을 가르치는 선택을 했다. 불행히도 회사는 기계치에 컴맹인, 그리고 IT에 큰 관심이 없는 나를 채용했다. 아무래도 내가 면접을 너무 잘 본 모양이다.
입사 후 3개월 동안 컴퓨터 언어 교육을 받고 4명이 한 팀이 되어 웹사이트를 만드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했다. 그때 우리 조에서 만들었던 사이트의 컨셉은 ‘인맥관리’였다. 사용자가 업무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 직업, 특징, 미팅 일자, 기타 특징 등을 메모해두고 그것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이다. 파일럿 프로젝트를 하며 시스템을 개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몇 줄의 코딩으로 머릿속에 있던 내용이 노트북 화면에 구현되고 데이터가 저장되는 그 과정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더 알고 싶지 않았다. 3개월 교육만 버티면 다시는 코딩을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코딩을 해야 하는 현업 업무에 배치받았다. 인사담당자와 면담을 했지만 회계팀이나 기획팀에는 그 해 충원 계획이 없었다. 코딩이라니. 시스템 관리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회계팀에 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다른 회사를 다시 알아봐야 하나?’
‘다른 회사에 간다면 나는 어디에 지원을 해야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와중에 깨달았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을. 그동안 줄곧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만 고민했을 뿐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좋은 대학 졸업해서 취직하고 알뜰하게 월급을 모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것. 대신 내가 자랐던 시절보다는 조금 더 여유있고 조금 더 화목하게 사는 것. 거기까지가 내가 꿈꿀 수 있는 전부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어렸을 때도 해야 한다고 기대받던 일을 잘했을 때는 칭찬을 받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말했을 땐 엄마의 깊은 한숨을 마주해야 했다. 엄마의 한숨에 무게를 더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하고 싶은 일.
그건 어떻게 찾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 일만 없는 것도 아니었다.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언젠가 친구 Y가 "우리가 취향이 없는 이유는 경험이 없어서 그래. 사는 게 팍팍해서."라고 말할 때 "무슨 실없는 소리야. 공부나 해."라며 타박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Y는 내가 지금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대학이 그런 생각을 하고 시도를 해볼 기회였을 텐데 이미 시간은 모두 지났고, 나는 당황스러운 일을 하거나 백수가 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앞서 이야기했던 드라마의 에피소드에 연수의 나레이션이 이어졌다.
'평범하게 남들처럼 사는 거 그게 내 꿈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내가 원한 꿈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선택지 없는 시험지였을까?'
파랑새를 찾는 여행
사실 그때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일을 해보기로 결심하는 것 외엔. 다른 회사에 다시 합격한다고 해도 당황스럽지 않은 일을 하게 될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이미 경험했던 수십 장의 서류 광탈을 생각할 때, 다시 취직할 수 있을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그리고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꼬박꼬박 정해진 날짜에 내 통장에 입금되는 예측 가능한 수입. 그 돈으로 나는 먼저 직장인에게 어울릴 만한 옷, 구두, 화장품 같은 것들을 샀다.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태고 제대한 동생에게는 용돈을, 언니에게는 핸드폰을 선물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비싼 공연을 보고 더 비싼 식당에 갔다.
월급은 나에게 사람답게 사는 감각을 선물했다. 돈도 벌면서 내 취향도 만들고 하고 싶은 일도 찾아보자 생각했다. 다행히 회사일은 할 만했다. 회사에서 나에게 요구한 것은 창의력이나 천재성이 아니라 성실함과 책임감이었고, 나는 그 부분에 자신감이 있었다.
동시에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시도했다. 예를 들면 특정한 목적이 없는 배움 같은 것 말이다. 취향이 고팠다. 스스로 한계 지워버린 좁은 경험치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고가의 화장품으로 화장을 한 후 명동에서 30만 원이 넘는 펌을 했다. 여러 가지 강좌를 찾아다니며 수업을 듣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샀다. 십만 원이 훌쩍 넘는 뮤지컬을 보고 나오며 새롭게 오픈한 콘서트, 페스티벌 티켓을 고민하지 않고 결제할 때는 짜릿했다.
어느 해인가는 드럼을 배우기 위해 주말을 몽땅 반납하기도 했다. 몽골 테를지 국립공원에서 말을 타고 달릴 때는 심장이 열리는 것 같았고, 혼자 떠났던 라오스 방비엥에서 맥주를 마시며 몸을 흔들 때에는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세인트 폴 성당 꼭대기에서 보던 런던의 풍경은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파랑새를 찾아다니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모험처럼 자아를 찾는 나의 여정은 몇 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내 안으로 흡수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뮤지컬을 보면서 그 순간의 감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처 보지 못한 뮤지컬 리스트를 메모했다. 몽골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사막의 밤하늘을 추억하기 전에 가보지 못한 다른 나라들을 떠올렸다. 많은 경험을 할수록 내가 아직 하지 못한 것들 생각하면 조바심이 생겼다.
그 조바심은 대기업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이 일정 부분 채워주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제자리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그래도 회사 다니잖아. 돈 벌잖아. 적어도 남들이 보기엔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 괜찮아. 아직 시간이 있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때는 몰랐다. 임시라고 생각했던 일이 이미 나의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채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출근하는 지하철 인파 속에 숨이 막힐 때면 언제나 생각했다. 이런 시시한 직장생활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 담금질을 하는 중일 뿐이라고. 언젠가 나만의 파랑새를 찾아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잊고 있었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던 파랑새의 정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