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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Nov 01. 2022

Don't look back in anger

캐롤길리건 <침묵에서 말하기로>를 읽고

(*)<침묵에서 말하기로>를 읽고 쓰는 글이지만, 글의 내용은 별로 없다.

책을 읽으면서 얻은 힌트로 길고 긴 (유사) 우울증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 대한 글이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그건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고쳐야 할 것들을 찾아서 지금의 불만족스러운 점들을 개선하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서 개선점이 떠오르기도 전에 먼저 치고 들어오는 생각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합리화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살 자리를 찾아간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했을까?' 같은 질문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끝난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연민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금이 불만족스러울수록 과거의 내가 한없이 불쌍해진다. 눈물이 절로 난다. 그리고 분노가 차오른다.


세상은 순결한 나를 오염시키는 환경.

나는 불쌍하고 가련한 희생자.

환멸과 자기혐오가 일상을 지배한다.  


사실 모든 일들은 그냥 일어난 일이고,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았다면, 상처받은 나를 다독이면 될 일이고, 다시 다음날을 살면 된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나 자신을 위해 변명을 해주고 싶었을까?


나르시시즘으로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이란 것이 원래 상처와 회복의 연속임을 알지 못하고, 세상은 성공과 실패, 건강한 것과 병리적인 것 이분법적으로 여기다 보니 나는 항상 밝고 좋은 곳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성공한 삶이고, 그래서 삶이 완전해질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게 안되니 삶의 모든 순간은 '수치심'으로 가득 찼다. 정답이 있는데, 그 정답으로 가지 못하는 오 답지 속의 나.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러니 내가 왜 오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을 해야만 그 수치심이 사라질 것이라 여긴 것은 당연하다.  


나는 하찮은 존재다. 이걸 알면 된다. 나는 상처받을 수도 있고, 갈등에 처할 수도 있다. 기쁜 날이 있으면 슬픈 날이 있고, 우울한 날이 있으면 행복한 날도 있다. 또 나는 결핍된 존재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연결된 존재이고, 혼자라고 느낄 때 항상 다시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 존재다. 그냥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누군가 나의 부족함이나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이다.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세상으로 부터 거리를 두고 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공간이라고 믿지 못하는 자는 세상을 약육강식의 세계로 볼 것이니 말이다.  나의 나르시시즘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시작점을 찾고, 계속 생각을 다시 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뀔 수 있을까? 심리학과 아동학의 여러발달 단계 이론에 따라,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애착을 맺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챈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부모가 제공한 양육환경에 부족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나열한다고 해서 갑자기 내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생길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나의 지난 삶이 증명해준다.

오히려 불안과 의심만 더 커질 뿐.



캐롤 길리건은 <침묵에서 말하기로> 에서 원치않은 임신을 하고, 임신중지를 고민 중인 여성들을 여러 시기에 걸쳐 인터뷰한다.  그리고 임신 중지를 선택한 여성들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그러한 선택을 하고, 그 사고의 차이가 몇 년 후 삶에 어떤 차이를 가지고 오는지 보았다.


처음 임신을 알고 여성들은 임신중지 여부에 대해 [이기심 vs 책임감] 의 프레임으로 고민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나의 삶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것이고,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책임감 있는 태도라는 식이다. 이것은 사회에서 원치않는 임신을 한 여성에게 원하는 사고 프레임이다. 선택의 기준이 '선

'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습적 사고다. 이 단계에서는 임신한 여성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제대로 고민할 수 없다.  아무리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여성들은 뱃 속에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바로 임신중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마음, 여러가지 여건 등에 대해 하나 하나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사회는 여성이 임신중지를 머릿 속에 떠올리자 마자 '이기적이다. 즐기기만 했냐. 모성이 없다.' 와 같은 이야기를 여성에게 퍼붓는다.

그러나 캐롤 길리건은 이 때 선택의 기준이 [선에서 진실로] 옮겨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진실은 '자기 진실성' 이다.  자기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하고, 지금의 삶, 미래의 삶,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고민하고 판단하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진실에 기반하여 선택을 했을 때 비로소 여성은 [책임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 가능해진다. 아이를 낳는 것이 자신의 미래 삶을 갉아먹고, 아이에게 제대로 된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없다는 판단에서 임신 중지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감 있는 선택이다. 그리고 실제로 임신 중지를 선택한 여성들이 그 몇년 후 있었던 인터뷰에서 깊고 진실한 고민 끝에 자신이 한 선택이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과정이었음을 말해준다.  내가 선택을 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감은 전적으로 내 몫이 된다.


임신 중지 선택은 삶에서 마주하는 매우 극단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극단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이 연구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적 관습이나 인습, 혹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자기 진실성' 에 따르는 선택을 했을 경우에야 비로소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가서.


과거에 대해 '왜' 라고 질문하지 말자. 자기 연민의 덫이다.

과거에 대해 생각을 할수록 자기합리화의 역사만 길어질 뿐이다.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의 오늘은 또 길어진 그 과거의 한조각이 될 뿐이다.

오늘 하루를 더 살아낸 나는 어제와 달라진 것 없이 조금 더 두꺼워진 과거 속에서 살아가게 될 뿐이다.


삶의 매순간

내가 경험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

그냥 습관적으로 인습적으로 지나가는 그 순간을 잘 포착해야 한다.

매우 의식적으로.

미세하게라도 불편한 지점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진실성' 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자기진실성' 에 기반하여 선택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나의 '자기 진실성' 에 기반한 선택들이 내가 맺은 관계를 뒤흔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밥은 아내가 하는 거야' 라는 생각을 가진 남편을 두고, '아이고 내가 큰 아들 키운다' 라며 희생하는 선택을 하던 이가, '밥은 배고픈 사람이 하는 거야' 라고 말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남편과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만약 내가 고생한 남편에게 밥을 차려주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희생도 아니고, 억울할 일도 없다. 그러나 싫지만 참고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다른 곳에서라도) 터질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은 이런 두려움 때문에 살던 대로 산다. 살면서 맺은 관계 속에서 적당히 역할극을 하면서.

불행하지만 안전하다. 살던대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쉽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내가 선택할 문제이다.


드라마 <글리치>에서 지효는 최면치료 받을 때 과거의 기억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고생하는 장면이 나온다. 열고 싶어하지 않은 그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가 그 문을 열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그 문은 쉽게 열린다.  


Don't look back in anger.


과거는 그대로 두고, 과거가 되어버릴 지금을 살아야 한다. 지금 내가 하는 선택들을 '자기 진실성' 에 기반해서 하는 것이다. 두려울 때에는 "나는 하찮다" 라는 치트키를 떠올리면 된다. 하찮으니까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내 인생에 큰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갈등이 생겨도 괜찮다. 내가 공을 던졌을 때, 받을지 말지는 그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다. 그건 그 사람의 삶이다. 내가 실존으로 덤비는데, 상대가 역할극으로 나온다면, 그게 그냥 우리 관계의 역량이다.


내가 인습, 관습, 세상 사람들의 시선,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바대로 선택하는 경험들이 쌓였을 때, 그리고 그 삶이 수용되는 경험을 반복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서 과거를 다시 해석하고 모순적인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힘이 생기지 않을까? 과거는 그 때까지 덮어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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