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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Feb 06. 2024

4. 안식년인 걸로 치고

퇴사 실패에 대한 짧은 정리


2월 26일부터 출근하지 않는다.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퇴사는 실패했다.

대신 1년간 휴직했다.


퇴사하겠다는 나에게 회사가 휴직을 제안한 사연은 사실

내 면담 내용 때문이기도 하다. 18년이나 다닌 회사에게 나는 일하기 싫어요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가 더 크기 전에  좀 더 밀착캐어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이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퇴사를 결정한 사유에 아이도 있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전적으로 육아문제로 고민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처음 휴직 제안을 받고 고민이 많았다. 어렵게 결심한 퇴사인데 뒤집는 게 좀 싱거운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고, 1년 더 적을 두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올해는 회사가 더 난장판일 거라 이 와중에 퇴사가 아닌 휴직으로 하던 일을 던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내 고민을 하는 내게 "그게 왜 이기적인 거예요? 매니저님 고생한 거 다 아는데, 회사에서 안된다는 거 우긴 것도 아니고 해 준다는데 왜 다른 사람 생각해요? 돈 안 받고 일 안 하는 무급인데 고민하지 마요 "라고 얘기해 주는 후배의 마음에 기대어 휴직원을 올렸다.


사실 회사에서는 복지처럼(자본론을 읽고 나니 이게 왜 복지인지도 모르겠지만) 제공해 주는 무급휴직제도가 있는데 작년부터 유명무실해졌다. 전결규정이 강화되었고 계획서를 제출해야 했다.  제도를 없애지는 않았지만 쓰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애초에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휴직원을 올리면서도 승인이 안 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어치피 그만둘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되게 싱겁게 승인이 나버렸다.  아직은 쓸모 있는 쪽으로 분류되어 있나 보다. (솔직한 마음으론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ㅋㅋ)


작년에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나는 일을 좋아하는 편이다. 일을 효율적으로 잘한다고는 못하겠지만, 작년에 했던 과제는 어쩌다 보니 휩쓸려서 했던 거긴 한데, 하나씩 이슈를 만들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재미와 보람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중심을 못 잡는다는 거.  사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마음을 주니 사무실 지박령처럼 야근하는 날이 늘었다. 어떤 일을 만드는 과정의 재미와 별개로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회의감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열심히 하는 시간은 괴로웠다. 그래서 일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본론을 두 번째로 읽으면서 이게 자본주의의 본질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나니 혼란은 줄었다. 조직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게 싫은게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방식이 힘들었던거였다.  결정은 내 몫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더는 새로울 게 없는 사회에서, 외로움이 디폴트 값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40년 넘에 익숙해진 물신주의적 사고 방식을 벗어나는 건 사실 다시 태어나야 가능해 보인다.


그런의미에서 이 주는 귀엽고 작은 혜택 (비록 납입유예지만 의료보험, 건강검진, 의료비 지원 같은 아주 아주 소소한 혜택이 있다.  그 외 회사에서 복지차원으로 제공해 주는 모든 것은 없어진다.) 이 있다는 점과 내 몫의 결정을 테스트해 볼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휴직은 나쁜 선택은 아니지 싶다.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에도 잠깐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건 좋은 기회다.

 

나의 퇴사 실패를 보는 회사 안팎의 다양한 시선이 있다.

호기롭게 관두는 것에서 대리만족을 얻고 싶었는데 실망이라는 사람,  퇴사가 아니라 휴직이어서 다행이라고 해주는 사람, 다들 힘든데 혼자 휴직 가냐고 눈빛으로 힐난하는 사람,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 쉴 시간을 얻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  각자 자기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들이라 그러려니 하고 있다.


일단 2월 26일 부터 나는 아침에 출근하지 않는다.

당분간 나의 시간, 노동력을 회사에 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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