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정희진 선생님이 팟빵 매거진 <공부>에서 이 드라마를 강력추천(23년 8월호)했었다. 이 드라마를 통해 가부장 중심의 가족 내의 어머니 이야기, 경기도라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경험하는 문제 등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날 팟빵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각자도생에 지친, 신자유주의 인간관계(밀당, 링 위에서 경쟁, 계산)로부터 해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주셨었다. 그리고 며칠 전 들었던 온라인 강의에서 배세진 선생님이 이 드라마가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을 보여주는 드라마이니 꼭 봐야 한다고 추천을 해서 이틀 동안 정주행했다. (정희진 선생님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을 하려면 3번은 봐야 한다고 하셨지만, 일단 한 번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둔다.)
추앙한다.
과거의 어느 시절 절대적인 지지를 애타게 찾았던 적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그런 마음. 나의 부모가 그것을 해주지 않아서(또는 못해서) 내가 이렇게 결핍감에 시달리는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세상에 그런 마음은 없다고. 모든 관계와 마음은 시공간에서 유동적으로 흘러 다니며 변한다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그런데 미정과 구 씨의 관계를 보면서, 그런 마음은 세상에 없는 게 아니라 '결심 혹은 결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모습이어도, 어떤 상황이어도, 내 옆에 있든 없든, 그 사람이 감기에 걸리지를 않기를, 평안하기를, 괜찮기를 바라는 것. 내가 그에게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온전히 진심으로 마음을 내어주는 것. 그건 결단으로 만드는 마음이다.
어머니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비해 자식들이 밥상머리에서, 밭에서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남매들은 아버지 눈치를 보긴 하지만 그건 순전히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일뿐, 할 말은 대게 다 했다. 엄했던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말을 하기 전에 그 말의 파급효과를 먼저 따지기 바빴던 나의 과거 어느 시절들과 비교했을 때 '저기서 저런 말을 한다고?'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염기정과 염창희의 타고난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염미정이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도 모를 구 씨와 연애를 한다고 해도, 염기정이 사춘기 딸이 있는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염창희가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해도 특별히 말을 보태지 않는다. 여전히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한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것 같았다. (이게 일종의 추앙이라면 추앙일 텐데, 염미정의 채워지지 않은 결핍을 보면.... 추앙은 부모자식 간에는 불가능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ㅎㅎ)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하고 돌아서는 남자가 불쌍해 결혼을 했다는 어머니의 대사에서 어머니의 타도난 태도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옳고 그름을 떠나) 성정대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조력 덕분이다.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그런 태도가 가부장을 강화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머니가 가부장제 하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다고만 말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전력을 다해 살았을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과로이고 타살이다. 돌봄 노동이 가족에게 조금도 분배되지 않는 것 가부장 구조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온전히 누린 아버지와 자식들의 잘못이 사라지는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가족들이 세탁기 앞에, 가스레인지 앞에 서고 시장에 들르는 풍경들이 그래서 더 슬프게 느껴졌다. 아버지 생일을 맞이하여 집에 온 자식들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부산히 움직이는 것, 창희가 새 어미니가 부담스럽지 않게 죽도록 빚을 갚은 것(부모로부터 심리적인 독립)은 어머니에 대한 각자의 애도의 방식이겠지.
성실함
삼 남매가 일을 참 성실하게 한다.
염기정은 회사에서 너무 연애 얘기를 많이 해서 저래도 되나 싶었지만, 염기정이 연애로 상징되는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태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중요시하는 태도는 '성실'이었다고 생각한다. 조태호가 주차를 하고 달려와서 핸드폰을 끄고 당신에게 집중하겠는 태도를 보이는 것, 염기정이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 때 '다행이다.'라고 말한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성실하게 설명하는 것, 계란빵을 좋아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성실하게 사다 주는 것, 그런 것들이 염기정을 살게 한다. 그녀는 추앙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감정을 계산하지 않고 직진한다. 조태호의 성실함은 그녀가 기댈 수 있는 해방의 공간이 되어준다.
염창희는 입으로 수없이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것이 귀엽게 보일 정도로 성실하다. 본인이 관리하는 편의점에 나갔을 때, 점주와 대화할 때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인가 고치고 치운다. 여자사람친구의 아픈 남자친구 머리도 성실하게 감겨주고, 빚도 성실하게 갚는다. 그가 가진 5억이 넘는 차를 운전해보고 싶어 하는 욕망은 그 성실함에 대한 다른 측면처럼 보였다. 그것은 남들보다 더, 혹은 남들만큼 가지고 싶은 욕망과는 좀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기기 위해 질주하지 않는 자, 질주함에도 패배하는 자에게 견딜 수 없는, 난감한 초라함을 남긴다. 애초에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다정한 사람인 그는 성실함이 초라해지는 그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가 우연히 마주친 전 여자친구에게 말한다. 운전할 때 자신은 다정해진다고. 그가 운전을 할 때, 그러니까 초라함이 그의 성실함을 가리지 않을 때 그의 원래 성정인 다정함이 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곧 망자가 될 사람들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 곁은 끝까지 지켜주는 다정함. 그의 다정함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그가 해방되는 순간일 것이다.
염미정은 온몸으로 성실함의 아우라를 내뿜는다. 아무리 상사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빌미로 엄한 소리를 해도, 주말에 언니 오빠들이 아무리 빈둥거려도 본인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불평 없이 한다. 안으로는 자신의 아무 말 없음이 타인에게 이용당하고 마는 것에 분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까지 보는 것은 끝내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그건 그녀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세상이라는 거다. 염미정의 이름으로 신용대출을 받고 도망친 주제에 뻔뻔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전 남자친구, 바람피우는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염미정의 이름을 이용하는 직장상사처럼 세상에는 뻔뻔한 사람들이 넘치고, 그들에게 염미정은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아니라도, 당신이 나쁜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한 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염미정은 구 씨를 추항하면서 그 용기를 만들어낸다. 구 씨의 추앙을 받으며 에너지를 채워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모함에 빠뜨린 회사 동료의 머리를 갈겨버릴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을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 행동의 시간들이 모여서 나는 변하고 변하는 내가 해방 그 자체가 된다.
필요한 건 느슨한 연대
세 남매가 서울에 와서도 한 집에 사는 게 재미있었다. 물론 방한칸 구하기 어려운 서울이라는 환경적 조건이 그들을 한 집에 살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그 이유만으로 함께 산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산포에서 맥주를 마시며 하릴없는 농담을 하던 친구들과의 시간 속에서도 남매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는 연대하는 공동체처럼 보였다. 이미 살아온 시간들을 알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때 맥락을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친구들은 하나 마나 한 듣기 좋은 칭찬으로 대꾸하지 않는다. 욕도 하고, 비난도 하지만 응원과 지지가 바탕에 있다. 해방의 전제조건은 그런 관계가 아닐까? 매일 밤 모이던 친구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