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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Jul 21. 2024

비정상이 되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까?

<감시와 처벌>을 읽고 

(*) 인문약방 강학원 프로그램 <주체화 이론 수업> 중 푸코의 <감시와 처벌> 3부에 대한 미니 서평을 썼다.   


  절대군주 하에서는 국왕의 권력에 대한 도전하는 행동은 바로 범죄로 여겨졌다. 형벌의 목적은 절대 권력이 행하는 보복이자 강렬한 공포를 통해 군주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단죄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지가 찢기고 손목이 절단되는 등 극악의 신체형을 통해 이루어졌다.. 18세기에 들어와 ‘개인’을 중심에 두는 철학(데카르트의 코키도)과 정치사상(사회계약론)이 나타나고, 경제적으로 재산권과 소유권이 중요해지는 사회가 되면서 범죄의 대상과 처벌목적이 바뀌었다. 이제는 사회의 규칙에 해를 가하는 것, 특히 사유재산 침해하는 것이 범죄였고, 처벌의 목적은 범죄로부터 사회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개혁론자들은 범죄목록과 그에 해당하는 징벌을 법전에 명확히 기술하는 것(처벌의 기호기술론)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명징한 인과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처벌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집행하면서 민중들 눈앞에 법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개혁론자들은 얻고자 했던 것이 개인이 건전한 시민이자 사회계약의 당사자로서, 법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바로 인간이 진보와 성장 그러니까 휴머니즘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근대의 형벌은 개혁론자들의 바람과 달리 개인들을 ‘감옥’에 투옥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푸코는 그것을 징벌의 실제 목적이 사회계약론을 맺는 주체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순종적인 신체(docile body)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전주의 시대(*) 권력은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작동을 했고, 그리고 감옥은 행형의 관점에서 순종하는 신체를 길러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순종적인 신체란 무엇이고 왜 그러한 신체가 필요했을까? <감시와 처벌> 3부를 통해 푸코는 그 내용을 상세히 다룬다. 


  푸코에 따르면 신체는 과거부터 언제나 권력이 작동하는 대상이었으나 고전주의 시대에 권력의 대상이자 표적으로 신체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 시대에 신체는 절대 군주의 권력이 표상되는 대상이 아니라, 교정되고, 복종하고, 순응하고, 능력이 부여되거나 힘이 다양해질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정의한 순종하는 신체다. 고전주의 시대의 권력의 형태인 규율권력을 통해 순종하는 신체가 만들어진다. 규율이란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체력의 지속적인 복종을 확보하며, 체력에 순종-효용성의 관계를 강제하는 방법을 말한다(216쪽). 규율은 개인이 한껏 힘을 키우도록 독려하면서, 그 힘이 권력이 원하는 대로 쓰이도록 강제한다. 순종하는 신체는 권력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움직일 뿐 아니라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관리된다. 규율은 학교, 구호기관, 기숙사, 군대 등 사회의 여러 제도와 조직 내에 산발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사소한 과정을 서로 모방하고 지원하며 총체적인 규율권력의 조직이 완성된다. 푸코는 이를 두고, 규율은 사소하고 세부적인 사실의 정치 해부학(218쪽)이며 권력의 새로운 미시 물리학(218쪽)으로, 겉으로는 근대적 휴머니즘을 표방(222쪽)하지만 실은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용의주도한 악의의 계략(218쪽)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규율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감시와 처벌>을 읽으면서 가장 거부감 없이 읽혔던 부분인데,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단 개인들을 폐쇄된 공간에 배치한다. 고전주의 시대에 방랑자들과 빈민은 구호 기관에 감금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 학교, 공장, 병원 등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에 소속된다. 그곳에서 개인들은 서열을 통해 위치가 정해지고 위치에 맞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요구받는다.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목표가 제시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훈련이 진행된다. 훈련과정에서 개인에게 진보이고 성장으로 제시되는 숙달된 능력은 실은 권력이 필요로 하는 그것이다. 이렇게 복종하는 순종적인 개인들은 협업의 힘으로 집단적 차원에서 더 큰 효율을 만들어내도록 조직된다. 


사상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완전한 사회의 꿈을 18세기의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의 것으로 돌리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군사적 통제의 꿈도 있었다. 그것의 기본적인 준거는 자연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장치의 주도 면밀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있었으며, 원시적인 계약이 아니라 끝없는 강제권에, 기본적 인권이 아니라 끝없이 발전되는 훈련방법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 자동적인 순종에 있었다. (265쪽)


 규율권력은 위계질서적 감시, 규범화된 상벌제도, 시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순종적인 신체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순종적인 신체는 하나의 data 이자 사례로 활용되며 지식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축적된 지식에 따라 사회를 관통하는 규범들이 설정되고, 그러한 규범은 사람들에게 일상의 지침으로 강제된다. 순종하는 신체를 가진 개인들은 궁극적으로 규범에 부합하는 동질성을 획득한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규율권력이 작동하는 이상적인 구조로 제시되었다. 실제의 건축 형태로서 판옵티콘인지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상적 형태로 압축된 권력의 메커니즘으로 병원, 작업장, 학교, 군대, 감옥 등 다양한 곳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규율장치를 통한 권력의 행사는 지속적으로 개선되며, 역사적으로 점진적인 확장과 사회 전체를 통한 그 장치의 다양화를 통해 지금의 규율중심적인 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인권선언문과 함께 분명 사회계약론과 그를 기반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가 형식적으로는 그러한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체감하는 삶은 다르다. 현실은 절망적이나 누구를 향해 분노를 해야 할지도 모를 애매한 상황들이 있다. 푸코는 근대 사회에서 보편적 법치주의가 권력의 행사에 한계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부의 규율이 법률의 일시적 정지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노동쟁의권은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많은 파업이 불법으로 처리되고 처벌되는 것이 그런 경우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우리가 인권 신장 덕분이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는 통치구조의 변화가 실은 인구 증가에 따른 지배방식의 변화라는 점을 푸코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과거 봉건 영주나 절대왕정 하의 폭력적인 권력행사로는 더 이상 수지 타산이 맞지 않으니 순종적인 신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생산하게 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식으로 권력의 작동 양상이 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확산이 규율권력이라는 특유의 양식을 초래했다(339쪽)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근대 규율의 확대는 가능한 모든 지식의 확장을 가져왔고, 정교화된 지식이 다시 다양한 권력 효과를 가능하게 해 왔다. 


  권력은 우리가 보았으면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가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면 그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게 편하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선은 도처에 지뢰처럼 깔려 있고 어느 순간 누구든지 비정상으로 분류되어 교정의 대상으로 낙인찍힐 위험에 처해있다. 때문에 우리는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일상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푸코를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두려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게 해 주니까. 그 구분선의 임의성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주니까. SNS의 등장 이후로 우리는 너무나 성실하게 자발적으로 데이터가 되어 주고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던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원재료 역할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자기 계발 서사를 구축하고 퍼스널 브랜딩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산업혁명 시대의 러다이트 운동처럼 분노 대상에 대한 오판일 수 있다. 다른 상상력을 찾아내기 위해 오히려 뾰족하게 생각해야 한다. 푸코의 글은 그 칼날이 되어줄 수 있다.


(*) 푸코는 중세 이후 시기를 르네상스 시대, 고전주의 시대, 근대로 구분한다. 17세기~18세기를 고전주의 시대로 보고 이를 근대와 구분한 것이 그의 사상의 특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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