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삶>을 읽고
여러 권의 책을 지그재그로 읽다 보면 단어에 쌓여있는 레이어들이 예전보다 예민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문탁 인문약방' 공부모임에서 상반기 푸코에 이어서 하반기 주디스 버틀러 읽기를 하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젠더 트러블>에 이어서 <위태로운 삶>이다. 어렵기는 전자가 더 어려웠지만, 읽으면서 자꾸 멈추는 것은 후자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나를 다른 위치에 가져다 놓으라던 은유작가님의 조언(글쓰기의 최전선 북토크에서 내 질문에 대해 작가님이 해주신 대답)에 따라 지난 몇 년 동안 누가 시키지 않은, 목적도 없는 공부를 했다. 공부는 나를 다른 위치에 가져다 놓는 작업이었으니까. 공부를 통해 절대적인 흔들리지 않는 자아와 정체성을 찾던 내가 얼마나 근대성 그 자체였는지 알게 되고 가능하지 않은 것에 목을 매고 시간을 흘려보냈던 것들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동시에 공부에 위로도 많이 받았다. 내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가질 수 없어서 답답했던 것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애처롭게 매달리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문제없다고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전에 몇 년간 매달렸던 심리학이 나를 더더욱 나로 침잠하게 했다면, 사회학과 철학은 나를 사회와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이제 이 정도면 살만하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하나의 막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무엇일까?
<위태로운 삶>을 읽으면서 비로소 내가 몰랐던 던 하나의 레이어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버틀러는 '애도가능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도 비체화되지 않는 폐제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인간의 취약성에 대해 논의하고, 비폭력과 평등에 대해서 말한다. <위태로운 삶> 초반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버틀러의 이러한 생각이 꽤나 이상주의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을 돌아보면, 내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그런 미래를 꿈꾸는 버틀러는 나에게 이상주의자로 보였다. 그러나 꼼꼼히 마지막 장(5장)까지 읽으면서 버틀러가 이상주의적인 게 아니라 반대로 내가 폐쇄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버틀러의 글은 절박하다. 이런 생각의 변화에는 최근에 읽은 <아! 팔레스타인>의 영향도 있다. 9.11 이후 일어났던 전쟁, 팔레스타인 난민 그냥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 정도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나와 크게 상관이 없는 일. '세월호' 나 ' 이태원 참사' 등에 대해서도 안타깝고 슬프고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고 그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계였다. 어디까지나 중심은 나였다. 예전보다 살기 괜찮아진 나.
얼굴에 대응하는 일, 얼굴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다른 삶 속의 위태로운 그 무엇, 혹은 오히려 삶 자체의 위태로움에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 자신의 삶에 깨어 있다는 의미일 수 없고, 그러므로 나 자신의 위태로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위태로운 삶에 대한 이해를 추론한다는 의미일 수 없다. 그것은 타자의 위태로움에 대한 이해여야 한다. 그래야 얼굴이 윤리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위태로운 삶> 194쪽
물론 내 삶은 내가 살아간다. 그러나 나의 존재함은 나 스스로 인식을 통해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관계 속에서 나는 정의되고 구성되고 변별되고 변한다. 딸이 없으면 엄마일 수 없고, 친구가 없으면 동무가 될 수 없다. 학인이 없으면 나 역시 학인이 될 수 없고, 남편이 없으면 아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직접적 관계 외에 수많은 간접적 관계들 속에서 나는 구성된다. 나는 온통 타자로 구성된다. ( 수많은 상실의 경험을 통해 대상의 애도를 내면화하면서 우울증적 자기를 구성한다는 프로이트의 자아 분석 역시 이런 의미였나?) 내가 자각하고 있지 못한 것은 내가 타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버틀러는 우리에게 타인의 말 걸기에 대답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의무에 대한 대응은 "나 자신의 위태로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위태로운 삶에 대한 이해를 추론한다는 의미"여서는 안된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나는 버틀러의 이 문장에 자꾸 머물게 된다. 내 취약성을 바탕으로 너도 취약할 테니 함께 공존할 길을 모색하자는 정도(롤스의 정의론?) 이상이 있다고? 레비나스의 얼굴이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레비나스의 이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정확히 버틀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설프게 얼기설기 생각해 보자면.... 버틀러는 <자아와 이드>에서 애도는 타자의 내면화(합체, 동일시)를 통해 가능하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애도가 가능하다(48쪽) 고 설명했다. 괜찮은 내가 타인에게 공감하여 너도 괜찮아지기를 기도하는 것을 넘어서서 타인의 말 걸기에 감응하여 나도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내가 위태로울 수 있으니 너의 위태로움에도 공감한다는 것이 아니라 취약성의 측면에서 연루되어 있는 우리로서 내가 타자를 위태롭게 하는데 공모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 더 이상 공모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어제 친구에게 이제야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참 부끄럽다고 했더니, (친구답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던 그녀는 이제야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것에 대한 '부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이게 사실 그녀와 나만의 문제일까?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독려받아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나나나나!!!! 주체주체주체!!! 외치는 근대철학이 좀 그런 거 싶으니 말이다. 버틀러 책을 읽고 나면, 사놓기만 했던 '타자철학'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