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시스젠더일까?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틀러블>을 읽고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로 섹스와 젠더를 구분했다. 보부아르는 여/남 이분법으로 분류되는 섹스에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주어진 자연이고, 전제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 두 가지 성(sex)이 있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여성성', '남성성' 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는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보부아르가 쓴 <제2의 성>에 따르면 남성은 초월적 주체이고 정신이지만 여성은 내재적 타자이고 몸(자연)이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생물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여 왜 남성은 초월적 주체로서 지위를 선점하고 여성은 내재적 타자로 자리매김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실존주의자로서 여성 역시 몸의 굴곡진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적 주체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버틀러는 보부아를 좀 더 급진적으로 해석한다. 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와 자연적으로 주어진 섹스와 분리되는 것이라면 젠더가 꼭 두 개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버틀러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버틀러가 생각하기에 보부아르의 문제 제기에서 동성애는 폐재 되어 있다. 버틀러는 젠더가 여러 개 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전개하며, 그동안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섹스와 젠더의 인과관계를 바꾸어버린다. 신체적으로 여성인 몸이 먼저 있고, 그 몸이 문화적으로 학습하여 젠더를 습득하는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비판하며, 사실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강제적 이성애 체계의 필요에 따라 이분법적인 젠더가 구성되었고, 그 젠더의 근거 혹은 효과로서 성(sex)의 범주가 두 개로 정의된다고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는 원래부터 젠더였던 것이다. 언어가 그리고 문화가 남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세상을 향해, 그렇게 구분하는 거 너무 이상하지 않냐며 과감하게 전복적으로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이름만 겨우 들어본, 혹은 이름도 처음 들어본 학자들의 여러 가지 주장들을 근거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 책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학자들의 주장을 긍정하고 부정하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젠더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등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젠더가 강제적 이성애(이성애적 모태 혹은 이성애적 계약)의 결과라는 주장. 이성애를 당연한 조건으로 생각하며 살아왔고 때문에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서 이성애가 강제되었다는 말이 확 와닿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성애자인데, 절대다수가 이성애자라면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기존의 사고방식과 논의들에서 동성애가 폐제되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면 동성애 또한 사람들이 인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책을 덮으면서 나는 동성애자는 왜 당연히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이성애자의 허락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인정한다는 오만한 태도를 가지고.
페니스와 자궁을 가진 남녀가 만나 아이가 생기는 것이니 이성애는 재생산을 위해 필연적이다. 그런데 정말 필연적인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 정자와 난자의 주인이 사랑하는 사이여야 하는가? 섹슈얼리티는 반드시 이성애적이어야 하는가?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이론에 따라 정상적인 발달을 이루어 남성과 여성이 되는 것만이 정말 자연스러운 것인가? 동성애자는 성도착자인가? 많은 여성들은 사실 알고 있다. 육체적 쾌락이 성기 중심의 삽입 섹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만약 성적인 만족이 필요하다면 혼자서 혹은 동성의 사람의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자, 갑자기 나는 정말 시스 젠더인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동안 특별한 애착을 느꼈던 많은 친구들이 생각났다. 관계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 친구들 사이의 관계를 질투하는 마음, 내 일상을 공유하고 그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들과 그동안 연애했던 남자친구들에게 느꼈던 감정들 사이의 간극이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자인 친구들과 이성애 관계에서 하는 스킨십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건 정말 스킨십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런 건 없다!'라고 이미 학습해서일지도 모른다. 이성애가 자연스럽고 강제적인 사회에서 사는 게 아니라면 그래서 애정관계가 성별에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나는 혹시 양성애자일지도 모른다. 이성애는 재생산을 위해 강제된 것이 맞을 수도 있다. 사실 재생산을 편하게 하려면, 정자와 난자의 주인들이 아이를 키우는 것일 테니 말이다.
동성애자인 버틀러 입장에서 이건 너무 이상한 일로 보이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분법적 젠더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버틀러는 강제적 이성애라는 견고한 구조에 돌을 던지는 전략으로서 '원본 없는 패러디'를 생각했다. 젠더가 강제적 이성애에 의해 수행되면서 구축되는 것이라면, 패러디를 통해 원본의 실질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통해 물화된 젠더에 트러블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 패러디의 예로 든 것이 드랙인데, 버틀러는 이 예시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는다. 사실 버틀러의 전략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다. 수천 년에 걸쳐 견고하게 구성된 가부장제와 이성애에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으로서 드랙은 너무 사소하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들의 단단한 고정관념 사이에서 드랙은 비정상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이리가레가 주장하는 남근 로고스 중심적 의미화 경제 밖, 크리스테바가 말한 기호계의 웅얼거림이나 위티크가 말한 레즈비어니즘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푸코가 지적했듯이 권력관계 밖은 없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드랙만을 유일한 전략으로 내세우려는 게 아니고 드랙을 포함한 여러 가지 전복적 행위를 통해 이성애를 여러 섹슈얼리티 중의 하나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성애는 없애야 할 적이 아니라 있어도 되는 그러나 힘은 좀 빼야 하는 그런 것이다. 인류학자 조한혜정이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라는 주장과 상통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계란으로라도 바위를 치면 계란이 부서진다. 그러나 낱개의 계란은 부서질지언정 지속적인 힘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낙숫물이 구멍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움직임은 젠더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난민, 장애인이 어떤 소수가 아니라 존재하는 여러 명 중의 한 명이 되는데 힘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