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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Jan 04. 2022

[햇-마:당 presents] 겨울이 오는 냄새

우리가 계절을 느끼는 방법

고단한 직장인의 하루를 끝내고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서니 밖은 어느덧 어둑어둑하다. 오늘도 다 지났구나, 싶은 생각에 기지개와 함께 힘껏 숨을 들이켜본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한가득 채우고 코끝에 어떤 냄새가 스쳐 간다. 문득, 아,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 전구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것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들과 꽉 막힌 퇴근길에 멈춰있는 자동차들의 불빛마저 반짝이는 장식의 한 부분인 것 같이 느껴진다. 언제나 그래왔듯, 나의 계절은 냄새로 그 시작을 알린다.


나에겐 너무나 당연했던 계절의 냄새가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란 것은 어릴 적부터 알 수 있었다. 이제 갓 나이가 두 자리가 되었을 무렵, 친구들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봄 냄새”는 누군가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표현해도 쉽사리 이해 시킬 수가 없었다. 게다가 냄새라는 것이 워낙 주관적이고 기억에 의지하는 감각이다 보니, 내가 얘기하는 봄 냄새와 다른 사람이 떠올린 봄 냄새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내가 느끼는 봄 냄새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흙냄새에 가깝다. 그리고 아지랑이에 냄새가 있을 리 없지만 분명 아지랑이 냄새가 난다.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인지도 모르지만, 그 냄새를 맡으면 이제 봄이구나 느낄 수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는 풀 냄새가 난다. 잔디를 깎았을 때 피어오르는 풀 냄새가 공기 중에 진동을 한다. 여름에 가까워질 수록 햇빛 냄새가 강해지고 한여름의 낮에는 아스팔트 타는 냄새와 비릿한 땀 냄새가 함께 난다. 여름에는 밤이 되어도 햇빛 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 하지만 뜨겁게 작열하기 보다는 조금씩 식어가는 태양의 냄새, 기분 좋은 냄새가 풀벌레 소리와 함께 뒤섞여 한여름 밤 공원을 채운다.


가을에는 여러 낙엽 냄새가 난다. 축축한 낙엽 냄새도 있고, 바삭하게 건조한 낙엽 냄새도 난다. 어디서 무언가를 태우는지 장작 타는 냄새도 나고, 마치 동굴에 들어간 것 같은 약간 축축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짧은 가을이 아쉬울 무렵 칼날 같은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겨울 냄새는 마치 투명한 고드름 같은 느낌이 난다. 굳이 설명하자면 추운 겨울날 밖에서 집으로 들어왔을 때 코트에서 나는 냄새. 아니, 어쩌면 이 냄새도 나만이 느끼는 냄새인 건가? 분명히 이 또한 내 기억이 만들어 낸 실재하지 않는 냄새일 테지만, 마치 이 길모퉁이를 돌면 한국의 포장마차가 있을 것만 같은 냄새도 난다. 붕어빵 가게는 분명 없을 텐데 빵 냄새와는 또 다른 달콤한 붕어빵 냄새가 거리마다 가득한 것 같은 느낌이다.


네덜란드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계절이 시작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쓰는 절기 중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가 바로 공식적인 봄과 가을, 여름과 겨울의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이 절기는 우리에게도 낯선 개념은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날짜를 “공식적으로 계절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배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도 “아직 동지가 안 지났으니 아무리 추워도 공식적으로 겨울은 아니다"라는 싱거운 농담을 동료들과 나누곤 한다. 나는 냄새로 알고, 누군가는 뼈마디가 시려오거나 몸의 변화로 알아차리는 것이 계절이 아닐까? 계절이란 것이 중요한 변수였던 농경 사회가 아닌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계절은 숫자보다 감각으로 정의가 되는 게 아닐까. 머라이어 캐리의 목소리가 그리워지면 겨울이고, 장범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면 봄이 된 것처럼, 우리의 계절은 달력의 숫자가 아닌 감각에서 시작된다.



[December, 2021]



이 글은 햇-마:당 에디션 범 내려온다! 에 소개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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