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아영 Apr 23. 2018

평화? 비둘기는 이제 그만  

평화교육, 다른 존재의 고통에 나는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묻는 일.

평화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온 많은 분들께 늘 드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평화’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세요?



‘평화’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세요?



이 질문에 대해 열에 여덟,아홉분은 "비둘기"라고 대답하십니다.



응???



그럼, 저는 두 번쨰 질문을 드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비둘기는 어쩌다 평화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비둘기는 어쩌다 평화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비둘기는 어쩌다가 평화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유력한 설을 두 가지 정도로 보는데요.

첫 번째는 비둘기가 전쟁 중에 소식을 전하는 파발꾼의 역할을 담당해 소식도 가장 처음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에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는 설이고요.  


두 번째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노아의 대홍수때, 홍수가 끝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노아가 방주에서 날려 보낸 새가 비둘기였고

감람나무 이파리를 입에 물고 돌아와 재앙의 끝을 알려주어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는 설이지요.


번번이 이렇게 ‘비둘기’라는 이미지로 호출된 평화는

이내 ‘분단 그리고 통일’이라는 주제로 이어졌고

그 주제는 곧 ‘평화라는 것은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사실 내 일상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야기로 귀결되었습니다.


평화가 중요하고 좋은 것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느냐는 막막함에 대한 토로도 많았고요.








평화교육 활동을 진행하며 일상에서 생각하는 평화를 표현해주십사 부탁드리면

대부분은 안락한 쉼이나 정적인 풍경 속의 자신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깝기엔 너무 먼 평화,

이루어지면 좋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평화,

고요하고 잔잔할 때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평화,

이렇게 ‘멀고 잔잔하며 이루기 어려운 평화’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평화를 실현해 간다는 것은 더욱 요원해보였습니다.


폭력으로 가득찬,

이 평화롭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평화교육 활동들을 하게 되면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의 색깔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흥미롭게도 평화의 상징으로 쓰이는 비둘기의 색깔은 흰색이 많습니다.

그것도 눈부시게 하얀 순백색의 비둘기가 많지요.


너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feat.김동률)




저는 순백색의 비둘기로 표상되는 평화가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갈퉁(Johan Galtung)이라는 평화학자는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로 분류했습니다.


소극적 평화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direct violence)에 대응하는 개념이고,

적극적 평화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구조적 폭력

(structural violence)에 대응하는 개념이지요.


전통적인 평화 관점에서 폭력은 직접적 가해 행위 또는 힘을 의미했지만

점차 직접적인 폭력이 가능하도록 하는 구조,

즉 비가시적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간접적인 폭력의 문제,

불평등하고 구조화된 권력관계를 통해 직접적 폭력이 어떻게 재생산되는가를 이야기하게 되면서


평화라는 가치가 소극적인 상태의 평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함께 다루는

'적극적 평화'의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평화에 대한 시선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갈퉁의 "적극적 평화/ 구조적 폭력" 개념의 기여는 정말 크지요.

그리고 "문화적 폭력"이라는 개념도요.


논외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요한 갈퉁이라는 분은 한국사회에서 "평화학의 아버지"로 불리우곤 합니다.

근데 저는 이 세상에 "무언가의 아버지"들이 너무 많은데

평화학에까지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 피곤해졌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인구밀도가 높은 것 역시 저는

구조적 폭력의 일부라고 생각하거든요.

사회 구성이 가진 가부장성, 내재된 남성중심의 권력구조는

이런 언어들을 통해 재생산되고 정당화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평화"라는 것은

현실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하고 다층적인 불평등과 부정의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백색의 비둘기로 표상되는 평화, 현실 세계의 먼지가 묻지 않은 평화,

현실과 뒤엉키지 않고 저기 어딘가 높은 곳에서 성스럽게 존재하는 듯한 평화는

온갖 갈등과 상처로 뒤엉킨 이 세계에서 과연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순수, 순결, 성스러움, 거룩함, 구별됨을 상징하는 흰색이 평화를 상징하는 것, 정말 괜찮을까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꼬질꼬질한 비둘기들은

발목 아래가 절단되거나 발가락이 잘려 있기 일쑤입니다.

도시에서 꾸역꾸역 삶을 이어 나가는 비둘기는 실상 소외되고

아무도 환대하지 않는 존재가 된 지 오래지요.


굳이 평화의 상징이 비둘기여야 한다면

저는 제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꼬질꼬질한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면 좋겠습니다.

평화가 새하얗게 표백되는 것 이상하지 않은가요?


저는 표백된 평화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은 곧, 평화가 단순명료한 듯 보이는 착각의 막을 걷어내고

나의 평화가 곧 다른 이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복잡한 관계에 들어서는 것,

다른 존재의 고통에 내가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헤아려 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렇게 헤아릴 줄 아는 감각,

내가 누군가의 고통에 어떻게 연루되었는가 묻는 일은  

소극적 평화의 한계를 넘어서는데 너무나 소중한 힘이 됩니다.


그렇기에 평화교육은,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자, 답이라 믿어졌던 것들을 낯설게 보고

아직 던져지지 않은 질문들을 찾아 함께 답해 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들이 다소간 불편하다고 하더라도요.


그 불편함을 기꺼워 하려는 노력이

우리 일상에서 평화의 자리를 더 넓게 만들어주지 않을까요?





그 불편함을 기꺼워 하려는 노력이
우리 일상에서 평화의 자리를 더 넓게 만들어주지 않을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