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진짜 짜증 나!"
남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내게 짜증을 토로한다.
"실컷 잘 놀고 왜 짜증나는데??"라는 내 질문에 남편은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 졌어. 운전하는 게임에서 이다민한테 졌어. 어떻게 내가 질 수가 있지?"
집에 있는 현금이란 현금은 다 들고 딸아이랑 오락실에 가서 신나게 게임하더니 결국 졌나 보다.
아... 이 남자의 승부욕.
그랬다. 남편은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논다.
어린 시절 딸아이와 보드게임을 할 때 보통의 아빠라면 아슬아슬하게 져주거나 혹은 간신히 이기는 척이라도 할 텐데... 이 아저씨는 절대 그런 법이 없다. 딸아이의 카드를 몽땅 다 뺏고 바닥에 드러누워 깔깔 웃어대면서 "이다민 엄청 못해!!!!"라는 망언과 함께 승리의 깃발을 흔들어댄다. 아이는 약이 올라 "아빠 다시 해"라며 재결투를 신청하지만...
남편은 역시나 아이의 카드를 다 뺏고 행복을 만끽한다.
딸아이 1학년 때그렇게 3학년, 4학년, 5학년의 시기를 보내던 딸은 단 한 번도 아빠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남편의 웃음소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안도의 한숨소리와 함께 "간신히 이겼네. 아 질뻔했잖아."라는 말이 종종 들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게임을 하던 남편은 치킨차차에서도, 할리갈리에서도, 그 외에 게임에서도 패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남편이 패배자가 된 게임들은 집에서 다시 꺼내지지 않았기에 이웃 주민들에게 '나누리'가 되곤 했다.
남편은 암기력 그리고 재빠른 암산 및 스피드를 요하는 게임에서 딸아이를 이기긴 어려웠으나....
다행히 남편에게 살아있는 종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운전'과 '농구'였다.
그런데 오늘!!! 운전 면허증도 없는 딸아이에게 운전을 져버렸고, 본인이 가장 잘한다고 믿는 농구게임에서도 첫판은 졌으니 오늘 내내 내 귀는 남편의 한숨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딱 여기까지-----------
내 옆에 있는 승부욕이 강한 이 남자는 아직 완성도 되지 않은 내 글을 딱 여기까지 읽었다.
그리고는 "너 또 내 욕 쓰냐? 대체 이 글의 끝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내 욕 쓰고 끝나는 거야? 마무리 어떻게 질건대???"라고 묻는다.
우아하게 자몽에이드를 쪽쪽 빨며 남편을 지그시 바라보던 나는 말했다.
"내가 대체 여보 욕을 얼마나 썼다고... 그냥... 오빠가 게임에서 지니까 나도 기분이 이상해. 오빠가 운전에서 졌다는 건 믿지 못할 일이라고!!! 마무리를 정하고 쓰는 건 아닌데... 쓰면서 생각해보니 오빠나 나나 이제 이길 일이 뭐가 있을까 싶더라... 이제 계속 질 날만 남은 건 아닌가 싶어서..."
내가 글을 쓰며 느낀 생각을 내어놓으니 남편 역시 무언가가 생각났다며 목소리 톤을 높이기 시작했다.
"너 강민 알아? 프로 게이머거든. 오빠 대학시절에 스타크래프트로 날리던 프로게이머야. 그냥 프로게이머가 아니라 거의 신 급이었어. 근데 요즘 유튜브로 게임하는 거 보여주는데 완전 재밌어. 게임하다 보면 상대방이 강민한테 막 몇 살이냐고 묻고 그런다. 그럼 강민이 마흔이라고 하잖아. 그러면 같이 게임하던 애들이 바로 '앗... 마흔이라고요?' 그러고는 놀라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마흔인데 리버 컨트롤이 되는 거예요?'이런다니까. 그럼 강민이 게임하면서 뭐라고 하냐면 20대 때는 이것보다 더 잘했다고, 진짜 잘했다면서 나이 먹으니까 손가락이 맘대로 안된다고 그러더라. 스타크래프트의 신이 그렇게 이야길 하더라고... 결국 아무리 잘했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육체적인 거는 밀릴 수밖에 없나 봐..."
대체 밤마다 핸드폰으로 뭘 보나 했더니 별별 영상들을 다 보고 있던 남편이었다.
나는 프로게이머 이야기를 듣고는 남편에게 물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거의 신 급이었으니 나이 먹어도 그 정도는 하지... 대충 평범한 나는 뭘 이길 수 있을까 싶네... 점점 이길 수 있는 게 없잖아."
남편은 뭐가 생각났다는 듯이 대답했다.
"경험! 경험은 무시 못하는 거 같아. 우리가 젊은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들보다 더 많이 살면서 누린 경험밖에 더 있어? 경험 엄청 중요한 거야."
"그렇지... 경험 중요하지. 근데 그 경험이 때로는 우리 생각을 더 가두기도 하잖아. 게다가 경험 들먹이면서 '라떼는 말이야'하면 꼰대 되는 거고... 음... 다른 거 뭐 이길 거 없나?? 아 맞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나이 먹으면서 생기는 여유와 인내 그리고 따스한 성품??? 이런 거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네가 얼마나 인내를 한다고?! 크크크크~ 회사만 가봐도 젊은 사람들 중에 성품 좋고, 바르고, 괜찮은 사람들 정말 많은 거 같아. 그건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른 게 아닐까?"라며 내 마음을 짓눌렀다.
근데 나는 왜 이리 수긍이 빠른 걸까?
"그러게...."
결론: 가면 갈수록 이길 게 없음.
나도 한 때 윗몸일으키기를 1분에 67개 했으며, 제자리멀리뛰기를 2 m30 cm 뛰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한 번 보면 전화번호, 영어단어를 기억하는 암기형 두뇌를 가졌었다.(절대적인 과거형)
그러나 지금은... 와인으로 만들었다던,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샹그리아'란 단어가 기억 안 나 "그거 있잖아. 달달한 와인에 과일 들어간 거! 그거 뭐더라??"라며 한참을 생각한다. 그뿐인가?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할 만큼 아파트 이름이 어렵다던 이야기에 깔깔 웃던 내가 도무지 친구 집 아파트 이름이 기억이 안 나 검색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에버랜드에서 장미꽃 축제 기간이 지난 뒤 슬슬 시들어가는 장미의 모습과 비슷했다.(다행히 꽃잎은 남아있는 거 같음)
2021.06.21 에버랜드에서 본 시들어버린 장미ㅜㅜ뭘 그렇게 이기려 했던 것일까?
장미를 보며 현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게 된 나는... 시간에 종속된 무언가를 이기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그 무언가에 이기고 싶어졌다.(이제 필라테스 할 때 몸매 좋은 언니들을 보며 시기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
선한 마음과 순수한 모습을 지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쉽게 노하지 않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젊은 사람들이 나를 만날 때면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꺼낼 수 있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어른이 되고 싶다.
다행히 내가 원하는 것들은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는 것들이니... 이것만큼은 나의 노력으로 이뤄갈 수 있을 듯하다............. 마는 신기하게 도무지 내 안에 자리 잡히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도 지금 내 마음가짐과 내 노력, 내 생각은 나를 변화시키고 있을 것이다.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 하지 않았던가! 외모는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내가 살아온 세월, 생각과 가치관, 나의 심리 상태의 모든 변화가 내 얼굴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은 이 마음을 품고 살다 보면 비록 머리숱은 없고 주름은 졌지만 다른 이로부터 '인상 참 좋으시네요'라는 말 정도는 듣지 않을까?
젊은 시절 외모에 대한 감탄사를 받아보지 못한 한과 서러움을 나이 먹어서는 풀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저 오늘이 어제보다 더 시들은 날이니 하루하루를 감사하고, 사랑하다 보면...
꽃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그늘이라도 주는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