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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미 Apr 12. 2022

오늘의 집이 아니라 나의 집

독립 준비에도 번아웃을 겪다니

그동안 독립에 대한 로망이 많았던 만큼 환상에 취해 큰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해서 나는 최대한 현실적으로 독립을 생각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동안 상상해왔던 집에 대한 로망들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예쁜 커튼도, 화려한 조명도, 감성적인 소품도 빨리 사서 집을 꾸미고 싶었고, 완성된 집을 빨리 자랑하고 싶었다. 필요한 물건들도 독립 이후 천천히 하나하나 채워가면 됐었는데, 나는 모든 게 완성된 채로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 도마 5종 세트. 편리해서 가장 작은 것만 주로 쓰고 나머지는 거의 손대지 않는다.


독립 초반엔 대충 냄비 한 개만 있어도 되지만, 나는 독립 전부터 냄비+프라이팬 크기별 세트를, 예쁘고 좋은 걸로 샀다. 며칠 동안 도마를 고르고 또 최저가를 비교해보면서 도마 3종 세트를 사고, 이후 나무 도마 감성에 끌려 나무 도마도 샀다. 지금 혼자 사는 내 집에는 도마만 5개다. 칼도 과도, 식도 등 종류별 3종을 샀고, 지금은 얼마 쓰지도 않지만 그때는 꼭 필요해 보였던 버터 나이프, 치즈 나이프 등도 공들이며 골라서 구매했다. 이쯤 되니 좋아서 한 일이지만 나도 슬슬 지쳐갔다. 뿐만 아니라 아직 보증금 잔금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이미 돈을 너무 많이 써버렸다.


나는 평소에 예쁘고 감각적인 것들을 좋아해서 그런 공간들도 많이 찾아다녔고, 에어비엔비 해비 유저로서 예쁜 인테리어의 집들도 많이 경험해봤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독립하면 예쁘게  꾸미고   같다' 말을 많이 , 나도 내가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왠지  하나 고르더라도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있었던  같다. , 부모님에게  소리 떵떵 치고 나온 만큼,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독립 문제로 계속 하소연을 해온 만큼 독립하자마자 예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뭐든지 예쁘고 좋은 것을 사서 '다들 걱정했지만  이만큼  산다!' 보여주고 싶었는데,  압박감이 돈을 쓰면서도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과 돈과 정성을 쏟는데 비해 내가 고른 물건들이 왠지 예쁘거나 마음에 쏙 들지도 않았다. 유튜브, 인스타, 오늘의 집에는 예쁘게 잘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다들 큰 고민 없이 대충 인테리어를 한 것 같은데 어쩜 그렇게도 감각적인 가구, 소품들과 함께 집을 예쁘게 꾸미고 사는 건지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못나보이기도 했다. 역시 이 정도 마음가짐과 예산으로는 독립하면 안 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때의 나는 보여주기 식 독립에 꽤나 매몰되어 있었다. 독립이 하나의 프로젝트인 것처럼, 빠르게 다 준비해놓고 입주하면 완결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달렸다.


어느 날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왜 독립을 한다고 했더라?" 하며 길을 잃기도 했다. 이럴 땐, 내가 혼자 남긴 기록들이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기록을 집 계약도 다 끝난 마당에 다시 한번 들춰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부모님과 독립을 문제로 다툰 날,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본가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날, 집중을 위해 혹은 쉼을 위해 오히려 집 밖을 나서야 했던 날. 때론 감정적이었고, 때론 차분하고 논리적이었지만 남들을 설득해야 했던 만큼 나 자신도 설득하고자, 내가 독립을 원했던 순간과 이유들을 적어 내려갔었다. 이럴 땐 참 독립에 대해 반대가 많았던 게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나에 대한 집중. 어쨌든 나는 이걸 위해 계속  힘든 노력을 애써 들이고 있었다.  집은 오늘의 집이 아니고,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 계속 혼자서 살아가야  집이었다. 독립은 완결이 아니고  이후 계속 계속 현재 진행형일 나의 상태였다. 독립하려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집의 이미지보다,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지가  먼저 그려졌다. 예쁘게 꾸며놓은 책상과 소품들이 아니라, 책상 앞에서 책을 거나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모습이 주인공으로 보였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놓으니 계속 신경 쓰이던 남의 눈치에서도  벗어났다. 이렇게 독립 준비에도 번아웃을 겪으며 드디어 입주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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