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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rr Nov 09. 2024

아빠 미안해사랑한다

당신을 약하게 하는 사람이 당신이 가장 사랑한 사람이라서요.



정신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누가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거라서. 파트장이 퇴사하는 바람에 갑자기 직무가 바뀌었는데 의지할 곳이 없었고 책임을 져야 했다. 그 누구도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수가 용인되는 건 아니었다. 일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다시 또 삶에 일이 미친듯이 범람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을 다 지워야 했다. 빠져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거라, 내가 잊지를 못할 거라, 나는 치열하게도 잡념을 지우고 지금에 집중해야 했다. 마음의 준비를 못한 수많은 것들이 흔드는 수준이 아니라 나를 후려쳤다.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 떨어져 가는 텐션을 아득바득 평균까지 끌어올리려고 나는 슬픈 노래도 듣지 않았고 우울한 책도 읽지 않았고 괜히 혼자 생각에 깊게 빠지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상태로 살아보려고 이를 악물었다고.


그러다 집에 수도문제가 생겼다. 회사에 있는데 아빠한테 수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전화해 보니 딱히 큰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대충 머리에서 지우고 일을 했다. 아무튼 일을 했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집에 가니까 온 집안이 물난리였다. 망연하게 주저앉을 생각조차 안 들정도로 물난리. 막막한 마음에 아빠한테 전화를 했는데 아빠가 회식이라 취해있었다. 열이 뻗쳐버린 나는 전화를 대충 끊어버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치우기 시작해야 어찌 됐든 다음날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찰방 이는 집 안을 다 들어내고 머리를 비우고 청소했다. 그냥 일단 생각을 안 하고.


다음 날이 되고 바로 배수공사를 시작했다. 아빠가 그 시간에 대신 와줬다. 아침에 전화해서도 짜증을 냈고 점심에 공사확인을 하면서도 짜증을 냈다. 아빠가 상황설명을 하면서 얼핏 관리사무소 편을 드는 거 같으면 아득바득 물어뜯었다. 그 사람은 괜찮고 내가 밤새 치운 건 안 괜찮아? 아빠 술 마시고 취해있었잖아. 내가 새벽에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는 알아? 쏟아내다 서러운 마음에 울컥 눈물이 터졌다. 아빠, 내가 약 먹고 자는 건 알아? 나 신경성 부정맥도 있어. 내가 얼마나 숨 막히는지 알아? 이러는데 내가 아빠한테 힘든 얘기를 어떻게 해. 힘든 얘기 하는데 취해있었잖아. 지겨워죽겠어.



뭐가 지겨웠을까? 사실 내 삶이 지겨웠을 거야. 그냥 이렇게 버티고 서있어야 하는 이 삶. 자칫하면 굴러 떨어질 거라서 중심을 굳건히 잡았어야 했던 삶. 근데 중심이랄 게 없는 나. 나는 견디기가 지금 좀 버거운데 그 버거움에 매여있을 시간이 없다. 그러고 싶지 않아. 무너지고 싶지 않아. 싫어.




아빠가 미안하다고 했다. 됐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몇 시간이 지나 아빠한테 문자가 왔다. 문자가 왔다고? 우리 아빠 문자 보낼 줄 모르는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016을 고수하고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야 2G 폰을 졸업한 아빠라 문자 보내는 방법도 모르던 사람의 문자.




내가 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었다. 아빠는 나한테 그저 아빠인데, 여전히 든든하고 거대하고 멋진 사람인데 내가 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었다. 아. 내가 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었어. 나는 순식간에 딸을 향한 아빠의 마음을 꾹꾹 내리밟았다. 그게 나를 절망하게 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그의 삶에선 약해질 수많은 일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내가 되었다. 하나뿐인 막내딸이. 그가 인생에 크게도 사랑했을 고작 스물몇 살짜리가. 또 스물몇 해를 딸로서, 아빠로서 살게 한 그 막내딸이. 아빠 그래도 내가 제일 예쁘잖아, 하고 칭얼대던 그 막내딸이 그를 서럽게 했다.


전화를 하고도 입을 못 열었다. 문자를 어떻게 배웠어, 하니 할 줄 몰라 한참 걸렸다고 했다. 할 말이 없어 그냥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며 몇 분 안 되어 전화를 끊었다. 길에 주저앉고 싶었는데도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기 직전의 마음으로 집까지 한 시간을 걸었다. 집에 와서도 3km를 뛰었다. 그래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여전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울기 직전의 마음이다. 사실 그래왔다. 뭔가를 다 덮고 싶어 졌다. 아득한 마음. 사실 어디까지 깊어졌을지 모를 상처와 그걸 대충 덮은 휴지쪼가리 같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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