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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rr Dec 13. 2023

두 번째 질문, 어쩌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지쳐있지는 않나요?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보다 지친다, 고 말하는 것이 쉬운 세상이다. 하루에 몇 시간은 기본적으로 보고 있는 화면에서는 세상이 말세라는 말과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휘몰아친다. 무언가를 쉽게 확산시킬 수 있는 매체는 이래서 두렵다.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세상이 말세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말할 곳이 그곳밖에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서점에서는 어찌 되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책과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책이 같은 서가에 놓여있다. 어딜 가나 서로를 위로하려는 사람들이 넘치는 것 같은데 정작 우리는 왜 늘 지쳐있을까. 깊게 내쉬는 한숨을 희뿌옇게 보여주는 계절에,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그득 담아 내쉬고,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한다. 한숨이 의미를 가지는 선명한 겨울이다.


인생과 인생의 지침을 글감으로 다루기에는 참 두려운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괜찮다고 외치는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어쩌면 그것이 가장 쉬운 말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괜찮다,는 말은 웃기게도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그러니 그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는 말이고,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괜찮다고 외치는 것일 테다. 그리고 또 괜찮지 않으면 어떡할 것인가. 삶은 길고 우리는 하루라도 행복해야 하는데.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서로의 아린 부분을 보듬을 수 없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잦은 순간에 가장 이기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주관적이라는 단어는 늘 모호하고, 사람마다 다르다는 문장은 모든 것의 정답이기 때문에 이제 나는 감히 누군가의 지침을 언급할 수 없다. 타인이 나의 지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제는 납득하게 되었다. 스스로 자문하기에, 나도 그들의 아픔을 보듬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괜찮다는 말을 내게도, 타인에게도 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었다.


서문이 길었다. 사실 변명이다. 누군가 정말, 정말 지친 사람이 이 글을 읽고 마음을 잃을까 봐. 나는 당신의 지침을 존중한다고 애써 외쳐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트북을 꺼낸 이유는 정작 내가 오늘, 내가 습관적으로 불행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던한 하루에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지친다, 고 한숨 쉬는 그 호흡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들어서. 몰아치는 하루에 나를 무너지게 하는 게 나 스스로가 아닐까 하는 불안은 쉬이 납득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아니 나는 정확히 안다. 불행에는 남 탓이 제일 쉽다는 것을.



일이 몰아치는 때가 있다. 내가 혼자 해 낼 자신이 없으면서도, 괜한 승부욕에 달려보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은 분명히 온다. 내가 하는 업의 특성상 더 그렇다. 잘 해내고 싶고, 내가 나를 인정하고 타인이 나를 인정하는 순간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들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일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천성이 인정과 승부욕이라 그런진 몰라도, 그럴 때 들끓는 행복이 있다. 그런데 입으로는 뭐라고 하더라. "아, 이거 어떻게 해. 진짜 너무 힘들었다. 이거 이런 식으로 하는 건 맞아? 오늘 진짜 지쳤다." 속으로는 어쩌면 즐겁다에 가까운 마음으로 달려 나가고 있으면서도 주변엔 괜히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굳이 변명하자면 혹시라도 실패할까 봐 깔아놓는 밑밥에 가깝다. 하지만 늘 말의 힘은 나를 지배해서 나는 어느덧 지친 사람이 된다. 주변에서도 나를 지친 사람으로 본다. 내가 느끼는 일의 희열은 오직 나만 알게 된다. 잘 해냈지. 결국 해냈지만 나는 그것에 버거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입으로 지친다고 뱉고 나니 나는 스스로에게도 오늘 정말 지친 사람이 되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피로한 날들이 연속되는 시기가 있다. 평소 자던 양만큼 잘 자지 못하고, 건강을 챙기지도 못하고, 의욕을 잃고 컨디션이 안 좋아질 때도 분명히 있다. 특히 나처럼 나의 루틴이 깨졌을 때 가장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항상 건강하게 하루를 지켜내면 좋겠지만 나는 그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라 가끔은 휘청이는 때를 보내기도 한다. 또 어쩌면 더 놀고 싶어서 그럴 때도 있지. 마치 어릴 적 엄마에게 이제 집에 갈 거야,라고 말하고 5분을 아득바득 더 놀다가 집까지 뛰어가던 시절처럼. 오늘 일찍 자고, 내일 개운하게 일어나는 것을 외면하고 오늘은 그냥 무작정 놀고 싶어- 하는 때도 분명히 있다. 아무튼 이러한 피로의 반복이 정말 나의 삶을 망쳐놓고 있는가? 그런데 나는 그럴 때 뭐라고 말하더라. "요즘 진짜 컨디션 최악이야.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이래서 앞으로 잘할 수 있는 게 맞긴 해?" 나는 안다. 사실 이 시간은 길지 않고, 언젠가는 회복할 일이며, 나는 이렇게 지치기에는 어린 나이라는 걸.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살다 보니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린다는 게 뭔지 모호할 때가 있지만.) 인생이 어디로 굴러가는지 모르게 지쳐올 때도 있다. 이럴 땐 정말 지친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내일이 두려울 만큼 밤이 버거울 때가 있고, 괜찮다는 단어가 인생에 있기는 했었던가 하는 때가 분명히 있다. 삶이라는 건 늘 변덕스러워서, 아무 사건이 없어도 완전히 무너지기도 하고 아무리 몰아쳐도 굳건히 버틸 때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시간은 결국 지나가고, 쳇바퀴 같은 일상은 어쩌면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서 나는 다음 날 눈을 뜨고 일상을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내가 아무리 내일을 두려워해도 그 불가항력을 이겨낼 수 없고, 여느 삼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내 감정에 취해 내가 갖고 있는 책임을 아무 말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친다고, 지쳤다고 수없이 뇌까리는 밤이지만, 그게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가장 큰 이유라는 걸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아무 일 없는 날도 있다. 그저 괜히 센티해지는 날이 있다. 떠나간 사람들이 쉼 없이 기억나고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머리를 지배할 때 하필 나오는 노래도 슬플 때.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조금 더 어른스러울 수 있었을까, 그게 정말 정답이었을까 하는 끝없는 질문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내가 해왔던 잘못된 것만 같은 선택들이 나의 저녁을 버겁게 한다. 의욕을 잃고 그저 침대에 쓰러지게 만드는 때가 있다. 선택은 돌이킬 수 없고, 잘못된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만 그럼에도 외면하고 감정에 휩쓸려버린다. 그냥 지치는 날이 되고 싶을 때다. 





결국 지친다는 것은 참- 어쩌면, 아직은 멀리해도 되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러고 싶다. 어떤 일이 있든 없든 지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 지쳐 무너지기에는 나의 저녁이 귀하고, 내일을 두려워하고 포기하기에는 그 진리를 이겨낼 수가 없다. 이럴 거면 지치지 않는 것이 좋다. 그저 오늘의 희열을 만끽하고, 후회를 빠르게 내려놓고 집청소라도 하는 게 좋다. 입으로 지친다, 힘들다, 인생이 이게 맞냐를 내뱉기 전에 괜찮았다고 도닥이는 게 낫다. 


평안이라는 게 참 웃겨서, 그렇게 평화로운 이름을 가지고서도 그렇게 지키기가 어렵다. 평안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지치고 무너지기도 한다. 저녁즈음의 무책임한 지침 끝에 내게 남는 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흘러버린 시간뿐이다. 손가락 사이에 껄끄럽게 붙어있는 모래 찌꺼기처럼 마음만 불편한 채로. 하루를 더 예쁜 마음으로 돌아보자. 지금보다 덜 지칠 수 있다. 정말 지쳤더라도 지나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어쩌면 삶에 가장 의미 없는 단어에 가장 의미 부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자. 그 무너짐을 외면하고 조금 더 행복하자. 괜찮다고 말하는 것보다 지친다고 말하는 것이 쉬운 세상에서, 지쳐 무너질 힘을 괜찮다고 말하는 데에 쓰자. 오늘의 저녁이 조금 더 나른하길 바라며.





그러니, 당신은-

오늘 습관적으로 지쳐있진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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