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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May 26. 2024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37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19

  <탈출까지 D-46~D-38:호주 배민, 요기요 체험기/호주 배민 vs피자집의 숨 막히는 회피전/피자집한테 떼인 돈 받아내기>



  <왜 피자여야 했는가>

  미남, 트렌드, 재미 등 없는 거 많은 호주에서도 유독 변변치 않은 것은 음식이다. 변두리에서 꾸준히 도태되어 왔기 때문인지, 맥도날드 감자튀김이 가장 맛있다는 영국 속국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음식에는 '맛'이 결여되어 있었다. 꽤나 그럴싸해 보이는 음식도 맛을 보고 나면 의문만이 들었다. 이게 무슨 맛이지? 아무런 간을 안 한 '묵'도 이것보다는 '맛'을 함유하고 있겠다 싶을 만큼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 후에는 항상 목이 말랐다. 단맛, 신맛, 매운맛, 감칠맛은 철저히 배제했지만 소금만은 아끼지 않았으니까. 장금이가 한 입 먹자마자 '어우, 짜.' 하고도 남을 나트륨 함량은 평소 짜게 먹는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될 때가 많았다. 맛도 없는데 가격도 비싼 호주의 비만율이 왜 이리 높은 건지가 희대의 미스터리였다.

미니김밥 12~13불(시드니 길거리 초밥집에서는 일반 초밥롤 6불 이하) / 애매한 맛의 치킨과 볶음우동 하지만 가격은 선명하게 비싼!

  외식 만족도가 높았던 적은 없지만 주말마다 읍내에 먹으러 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비록 음식을 받았을 때 부실한 비주얼에 한 번, 먹었을 때 어설픈 맛에 두 번, 계산할 때 어처구니없는 가격에 세 번 실망하기 일쑤였지만. 어차피 칼만 한 무더기 제공되는 인도 집에서 조리란 불가했고, 평소에 과자나 빵쪼가리로 대충 때우다 먹은 바깥 음식은 잠시나마 두보에 갇혀있다는 현실을 잊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 미미한 즐거움마저 포기하게 만든 식당을 갔을 때, 모든 욕망을 내려놓게 되었다.

  식당과 펍을 겸하고 있는 그곳은 꼬질꼬질한 저층 건물들과 대비되어 더욱 그럴싸해 보였다. 메뉴판을 받았을 때 가격이 시드니 식당들보다 비싸서 놀랐지만, 스스로에게 지난 5일간의 노역에 대한 보상을 주고 싶었다. 연어 스테이크와 토마토 파스타를 주문했다. 기대에 들떠서 얼른 음식이 나오기를 바랐다. 음식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높았던 기대감은 맛을 봤을 때 하한가를 치는 주식처럼 곤두박질쳤다. 연어 스테이크는 굵은소금에 처박은 연어를 입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은 맛, 토마토 파스타는 면을 케첩에 비빈 맛. 조미료를 하나도 안 쓴 것처럼 맛이 없는데 그렇다고 딱히 건강한 맛도 아니었다. 시판용이 아니라 가정용 음식인데 그렇다고 가족한테 대접하기에는 죄송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파스타는 20불 후반 대였고, 연어 스테이크는 무려 33불이었다. 갈라파고스에 갇혔다는 이유로 이런 걸 돈 주고 먹어야 한다니. 그 뒤로 나는 외식이 하고 싶을 때면 맥도날드, 헝그리잭(버거킹), kfc를 번갈아가며 갔다. 좀 더 특별한 게 먹고 싶을 때는 피자를 택했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꼴랑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인 피자마저도 박탈당하게 된다.

맥도날드/KFC/헝그리잭! 카드 전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피자를 먹고 싶었을 뿐이라오>

  피자집까지는 거리가 상당했다. 그래서 구글맵에 기재되어 있는 호주판 요기요에서 미리 주문을 하고 출발했다. 햇볕은 강렬해 눈 뜨기도 힘들었고, 노역을 끝낸 뒤라 기력이 없어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피자가 뭐라고 40분을 걷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피자를 먹기로 한 것도 감옥 같은 인도집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으니까. 물론 늘 도망의 연속이었던 이곳에서 맘 편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 양공장으로, 양공장에서 집으로, 또 크로스핏으로, 오라나몰로... 도망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

  적당히 식은 피자는 맛있었다. 긴 다리 혹사의 시간을 잊게 할 만큼. 그러다 카운터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말았다. '호주 배민으로 주문 시 10불 할인!' 큐알코드는 스캔하지 않고 못 배기게끔 대문짝만 했다.

  오프라인에서 쇼핑 후 해서는 안 되는 불문율이 있다. 온라인 판매가를 찾아보는 것. 더 싸게 살 수 있었음을 알아봤자 기분만 나빠지는 법이니까. 그냥 쓰자니 손해 본 것 같고, 환불하러 가자니 시간과 에너지를 또 써야 하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만족스러웠는데 바가지를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는 부르고, 피자가 더 먹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장장 40분을 걸어야 하는 이곳에 언제 또 올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홈쇼핑 마감 임박에 홀리듯이 지금 꼭 피자를 사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내일 새참이 필요했으니까 합리화하며 큐알 코드를 스캔했다. 접속하자마자 '앱 설치 시 10불 무료 쿠폰 증정!'이라는 팝업이 떴다. 번거로움을 이겨내고 앱 설치까지 했는데 막상 주문을 하려니 쿠폰 적용이 되지 않았다. 회원 가입을 안 해서 그런가? 더보에서 분노의 지점이 낮아져서인지 불쑥불쑥 인내의 한계가 찾아왔지만 가입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도 10불 쿠폰을 적용할 수가 없었다. 메인화면에 떡하니 떠있는데 자린고비의 고등어처럼 볼 수만 있고 맛볼 수가 없었다. 일행은 진작에 13불짜리 피자를 3불에 주문해서 수령까지 마친 상태였다. 조급하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중 결제 단계에서 자동 적용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무시하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 2.72불이 아닌 12.72불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내쪽에서 주문을 취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호주에 온 목적 중 하나가 영어였지만, 영어를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극도의 스트레스에 휩싸였다. 하지만 당장 카운터로 가지 않으면 조리에 들어갈 거고, 그럼 일이 더 복잡해질 게 뻔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할인 쿠폰 쓰려고 하는데 적용이 안 됐거든, 주문 취소 좀 해줄 수 있어?"

  "주문 취소는 우리가 못 하는데? 그리고 이 쿠폰 15불 이상 주문해야 쓸 수 있어."

  13불짜리 피자를 3불에 산 사례를 방금 눈앞에서 봤는데, 15불은 어디서 튀어나온 건가. 하지만 호주 노동자들과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기에 해결에 집중했다.

  "그럼 어떡해?"

  그제야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 조리 여부를 확인했다. 다시 카운터로 나온 그는 아직 조리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며 내게 쪽지를 건넸다. 쪽지에는 호주 배민의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이제 대면 영어보다 더 무섭다는 전화 영어를 해야 했다. 회피하고 싶었지만, 구경도 못해본 음식 때문에 증발한 돈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전화를 걸었다. 자동 응답 음성이 나온 뒤 전화가 끊겼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업시간이 끝나서 안 받나 보네, 어쩔 수 없지! 적어도 시도는 했다는 위안을 얻고 내일을 기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들이 전화를 받는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바다에 띄운 유리병 편지처럼 닿을 수 없는>

  아무리 받지 않기를 바라며 건 전화일지라도, 통상적인 영업시간 내에도 먹통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고작 12.72불을 떼어먹기 위해 유령 회사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모든 정황이 그쪽을 가리켰다. 피자집에서 받은 정보라고는 상호명과 전화번호, 둘 뿐인데 개중 쓸만한 건 상호명 하나였다. 내 돈, 꼭 돌려받고야 만다는 일념 하나로 구글링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호주 배민 홈페이지를 찾았다.

수수료를 안 받아서 일을 안 하는 거냐...?

  홈페이지 하단에 있는 문의 창구에 최대한 상세히 상황을 기재했다. 정보 하나라도 누락했다가는 일머리 없는 호주 놈들에게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할 게 뻔했으니까. 영업시간이 지났으니 내일까지 연락을 주겠다는 자동 응답이 돌아왔다. 차라리 잘됐다. 전화보다야 메일로 소통하는 게 더 편하고 정확하니까. 하지만 내일이 와도 메일은 오지 않았다. 내가 아직 호주맛을 덜 봤구나, 실성에 가까운 웃음이 나왔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홈페이지에 또다시 문의를 남겼다. 어제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답변이 날아왔다. 영업시간이 지났으니 내일까지 답을 주겠다고. 영업도 안 하면서 영업시간을 운운하는 뻔뻔함이 괘씸했다.

  구색뿐인 소통 창구에 두 번이나 당한 나는 독이 바짝 올랐다. 귀퉁이에 숨겨져 있는 추가 연락 수단들을 발견했을 때 내 눈은 아마 광기로 번득였으리라. 먼저 대표자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물론 의미 없는 시간 낭비였다. 문의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화면에 경쾌한 손가락과 함께 메시지가 떴다.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시지가 접수되었으며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물론 이 또한 제풀에 나가떨어지게 하기 위한 촘촘한 설계였다. 차곡차곡 축적되던 분노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답 없음도 대답이다...☆

  인스타그램으로 쪽지를 보냈다. 그들은 이 글을 작성하는 24년 5월까지도 읽지를 않았다. 결국 마지막이자 유일한 창구인 페이스북까지 흘러왔다. 마침내 최초로 호주 배민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연락해 줘서 고마워. 안타깝게도 우리가 취소나 환불은 못 해주거든. 피자집에 주문 취소해 줄 수 있는지 알아볼게. 헷갈리게 해서 미안.'

  더는 먹지도 않은 음식값 12.72불을 떼일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안도감이 몰려오며 스트레스 누적으로 뻣뻣해진 몸에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호주 놈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최초이자 마지막 답장을 끝으로 이 새끼들은 또다시 연락이 두절 됐다.


  <절대 반지 파괴보다 어려운 더보 세계관에서 떼인 돈 받기>

  답은 하나였다. 자력구제. 피자집에게 직접 돈을 받으리라. 여기 온 뒤로 심화된 대인기피에 영어 기피까지 더해진 상태에서 최선은 온라인 문의였다. 직접 방문하기는 주말에나 가능했고, 전화하기에는 내 영어에 한계가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구글 맵에 문의를 남겼다. 놀랍지도 않겠지만 답이 없었다. 그럴 줄 알고 은행에도 카드 결제 취소 요청을 했다. 은행에서는 가게에 부당 결제가 이루어졌는지 확인 후 처리된다고 했다. 당연히 취소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제만 이루어지고 상품을 제공받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가게에서 부당 거래가 아니라고 했다며 은행은 문의를 종결했다. 이쯤 되니 절대 이 싸움에서 지고 싶지가 않았다.

  피자집을 추노질한 끝에 페이스북 계정을 발견했다. 분노의 타자를 쳐내려 갔다. 피자집의 응답률은 굉장히 신속했다. 호주에서 가장 핫한 SNS가 전 세계에서 외면당하는 페이스북임을 왜 간과했을까. 진작 이쪽으로 연락할 걸 싶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유령 회사나 마찬가지인 호주 배민에게 나를 내던진 원흉은 피자집이었다. 답 해준 것 하나만으로 다 용서가 됐지만. 가스라이팅 당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관련부서'로 이관해 주겠다며 뺑뺑이만 돌려지다 보면 누구나 이런 반응이리라. 비록 그 응대가 '오늘은 가게 쉬는 날이니 내일 6시 이후로 다시 얘기해' 일지라도. 한국이었다면 기록해 두었다가 내일 처리 후 결과 공유까지 해주었을 텐데... 호주에서는 그런 걸 바라면 안 된다. 그것이 호주이니까.

  시간에 딱 맞춰 피자집에 다시 결제 취소를 요청했다. 그런데 피자집은 '결제 취소는 불가능하고 계좌 환불만 가능하다'라고 답장했다. 당연히 환불받을 계좌와 금액을 알려달라는 질문이 뒤따라야겠지만, 여기는 호주다.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대화를 주도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해야 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웅웅 알겠으니 환불이나 해줘요. 내 계좌는 커먼웰스 xxxxx' 하고 냅다 계좌를 불렀다.

  '방금 돈 환불해 줬어~ '.<'

  사람 환장하게 하는 윙크 이모티콘과 함께 입금된 금액은 12불이었다. 12.72불을 12불로 환불해 주는 결과가 어떻게 산출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음식 정가가 12.5불인데, 정가보다 더 적은 금액을 주다니. 불현듯 렌트비 끝자리를 멋대로 떼고 돌려주었던 소아성애자 노인이 떠올랐다. 베트남에서 여자 사 올 돈은 있으면서 가난한 워홀러 돈 떼먹은 노인이나, 주문 취소가 자기들 일인 줄도 몰라서 호주 배민한테 떠넘긴 피자집이나... 대체 두보 놈들은 어떤 세상을 살았길래 이런 상식을 갖게 된 거지? 내가 3n년간 쌓아온 상식을 붕괴시키는 그들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분노에 차 장문의 글을 써 내려가며 다짐했다. 내 돈을 돌려줄 때까지 왕복 80분을 걸어서라도 매일 피자집에 찾아가리라. 그리고 끝내 이기리라. 열불이 터져서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페이스북을 들락댔지만 피자집으로부터 답장은 오지 않았다. 노역에 지친 몸 덕에 어느 순간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깨어났다. 손, 발,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었으니까. 휴대폰에는 0.72불이 입금되었다는 알람이 떠있었다. 마치 먹고 떨어지라는 듯이.

당시 시드니에 사는 펜팔 친구와 나눈 대화. 안타깝게도 피자집의 윙크 공격은 기간 만료로 열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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