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18
"어.. 그냥 집으로 가면 안 될까?"
썬오 형제는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부터 시간 삭제를 위해 운동을 다니는데 매번 썬오 때문에 퇴근이 늦어져 여유가 없었다. 바로 집에 내려줘도 빠듯한데 멋대로 오라나몰에 데려오다니. 언급도 없이 묻지도 않고.
차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에도 어색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그만 형광연두색 차는 쌩하니 떠났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노역으로 인해 지친 몸과 마음은 금세 방전되었다. 까맣게 물드는 의식 사이로 안일함이 속삭였다. 어차피 내일 또 볼 건데, 괜찮겠지...
'여기 니 차 없는데, 너 혹시 집에 갔어?'
이별 통보 방식 중 가장 저열하다고 평가받는 게 '잠수이별'이듯이, 답이 오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대답 없음도 대답이라는 말은 전혀 와닿지 않아서 자꾸만 '구실'을 만들었다. 썬오는 원래 굼뜨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썬오를 기다린 시간만 40분이었다. 아무리 굼떠도 그게 가능해? 몰래 쥐새끼처럼 빠져나와서 도망갔나? 그러기에는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썬오 형의 차는 나타난 적이 없으니 사라질 수도 없었다. 대체 난 언제부터 바보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 순간 힘겹게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탁- 끊어졌다. 때로는 희망이, 때로는 분노가, 때로는 관성이 힘겹게 쥐고 있던 그것을.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애쓰지 않아도 될 일은 저절로 된다는데 여기서는 안간힘을 써도 될까 말까였다. 나는 이곳에 맞지 않는 조각, 튕겨져 나가는 게 순리가 아닐까. 하지만 현실에는 영화와 달리 엔딩이 없기에 언제까지 망연자실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도망을 가더라도 기차역까지는 가야 하고, 그러려면 일단 집에 가야 했다. 일단 썬오에게 할 말은 하고, 집에 가자.
'너네 집에 갔구나? 나더러 알아서 가라는 거네?'
역시나 답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버를 잡아야 했다. 인터넷 신호를 잡기 위해 슬금슬금 위치를 옮겼다. 그때 익숙한 형광연두색 차가 눈에 들어왔다. 예의 주시하고 있을 때는 없던 그 차는 내가 잠시 좌절하고 있던 순간에 출몰해 순식간에 양공장을 벗어났다. 곧 시야에서 형광연두차는 완전히 사라졌다. 허허벌판에 합성처럼 덩그러니 서 있는 동양인들을 못 볼 확률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썬오는 우리를 버린 것이다. 사람 좋은 척, 누구보다 돈독이 올랐던 그는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한 불공정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걸어서 광기 속으로>
썬오브 비치 형제로부터 해방된 첫날, 우버가 잡히긴 했는데 도착 예정 시간이 30분 뒤였다. 헛웃음만 나왔다. 이 정도면은 콜을 안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쉽사리 취소를 누를 수 없었다. 4시 40분에 일어나 8시간 10분의 노역을 마친 뒤였으니까. 털썩 공장 입구에 주저앉았다. 마음을 비우니 더는 눈앞을 스쳐가는 차들에게 박탈감이 들지 않았다. 얼마지 않아 도로는 적막해졌다.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우버가 언제쯤 움직이나 보고 있는데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 하얀 차에 탄 여자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태워줄까?!"
앞 좌석에 두 명, 뒷 좌석은 비어 있었다. 화면 속에서 우버는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취소하면 절반가량을 수수료로 떼어갈 게 분명했다. 운전석에서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안 탈 거야?!' 나는 벌떡 일어나 도로를 건넜다. 썬오가 떠나자마자 찾아온 그들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인도네시아 출신인 루시와 밀키는 더보에 오자마자 차부터 샀다고 했다. 차는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깔끔했다. 앞 좌석에 무릎이 닿지도, 시트가 지저분하지도 않은 데다 크리피한 주술 대신 10년도 더 된 케이팝이 흘러나왔다.
"슈퍼주니어...?"
조수석에 앉은 밀키가 머쓱하게 웃으며 본인을 슈퍼주니어의 오랜 팬이라 소개했다. 슈퍼주니어의 뒤를 이은 곡도 역시나 케이팝이었다. 플레이리스트는 2세대 아이돌 곡부터 현재까지 아울렀다. 모두들 화기애애하게 케이팝 아이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는 끼어들 수 없었다. 내 마지막 아이돌은 fx이기에... 입양 첫날 유기견처럼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내게 밀키가 물었다.
"너는 어떤 아이돌 좋아해?"
"아무도 안 좋아하는데.. 음.. 그나마 에프엑스...?"
"왓? 에프엑스?!"
그때 밀키의 경악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문명의 고립자, 동굴 속 타잔이라도 본 듯 경악한 건 루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내 얼굴에 서린 입양 첫날 유기견 표정은 더욱 심화되었다.
내리기 전에 넌지시 오일쉐어에 대해 물었다. 협상은 일사천리로 체결되었다. 주 5일, 왕복 기준 25불!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말은 대부분 콩깍지가 빗어낸 착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썬오브 비치 형제가 가고 루시와 밀키가 왔다면? 달구지 가고 벤츠가 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