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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May 13. 2024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35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17

 <탈출까지 D-62~D-48:썬오가 썬오브 비치가 된 사연 1/2대 오일 쉐어장 썬오/걸어서 광기 속으로/3대 오일 쉐어장 밀키>



  <왕눈이 얼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인도집에서 맞는 첫 출근은 공교롭게도 우버 기사 나단의 휴무일이었다. 택시비로 거액을 지불하며 하루를 열어서인지 노역하는 내내 언짢음이 가시지 않았다. 택시비를 내기 전에는 스트레스받느니 마음 편히 우버나 타고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더는 혼자 두 명분의 오일 쉐어를 구하려 애쓰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택시 두 번 탔다가는 파산할 지경이었다. (멜버른 공항에서 시티까지 가는 버스(30분) 편도 금액 26불, 더보 택시비(5분) 33~36불)

  문제는 더는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곱창방에 갇혀있거나 다른 곳으로 뺑뺑이 도느라 인맥도 없는데,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애저녁에 다 물어봤다. 한숨만 푹푹 나왔다. 영혼은 이미 죽었는데 육신은 로동수용소에 갇혀서 3초에 한 번씩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시야에 민이 걸렸다. 그러고 보니 민에게는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입사한 곱창방 소속 노예. 평소에 말 한마디 없이 곱창만 뒤집다가 부탁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아를 버리고 스스로를 부셔야만 살아남는 더보, 이미 나는 많이도 깎여나갔기에 눈 질끈 감고 질렀다.

  "혹시 너 타는 차에 남는 자리 있을까?"

  "미안하지만 인원이 꽉 차서 안 될 것 같아. 얼한테 물어봐."

  "얼...?"

  "응. 그래도 현장관리자잖아.."

  현장관리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얼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다른 슈퍼바이저들과 소위 노가리를 까는 걸 즐겼다. 하지만 입사 초기에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때 얼의 옥춘 같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며 '왓?! 계속 걸어 다녔다고? 알겠어!' 라며 엄청난 공감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뒤로 그에게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자력으로 오일 쉐어를 구하기 위해 용을 써야 했고, 존재하지도 않던 얼에 대한 신뢰는 지구 내핵까지 처박혔다. 하지만 마른걸레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낸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얼에게 떠돌이 개처럼 흙바닥을 터덜터덜 걷고 있다고 고해야 했다. 얼은 마치 처음 듣는 얘기인 양 직업 방청객 뺨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왓?! 그럼 오늘 어떻게 왔어?"

  "택시 탔어. 오늘 우버 기사 쉬는 날이라..."

  "왓?! 갈 때는 어떻게 가는데?"

  "그 시간에는 우버가 없어서 걸어가야 돼..."

  "오우.. 홀리...! 오케이, 내가 찾아볼게!"

  저번과 똑같은 멘트,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자력 구제를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얼에게서 회신이 왔다. 그것도 3일 만에.

  벽에 뚫린 구멍에서 쏟아지던 똥주머니와 창자의 행렬이 멈췄다. 노예들은 헐레벌떡 우비를 찢어발기며 노역장을 뛰쳐나갔고, 남은 건 썬오와 현장 관리자 얼뿐이었다. 썬오는 느긋한 태도로 더러워진 칼을 흐르는 물에 씻고, 팔에 초록 찌꺼기를 느릿느릿 닦았다. 혹부리영감의 노래주머니처럼 얼의 말주머니는 부릅뜬 눈인 건지, 얼은 눈을 최대치로 뜨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이제 너 안 걸어도 돼! 썬오가 널 도와주기로 했어!"

  "와! 정말?"

  "응! 퇴근할 때만!"

  학습된 사회화란 얼마나 반사적인지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우.. 와..' 하지만 그때의 내 표정은 명품 쇼핑백에 담긴 다이소 화장품을 선물 받은 이와 같았으리라.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물론 지금 내 육신이 여기 있다는 건 출근이 가능함을 입증하는 셈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출근의 안정성이 보장된다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나단이의 공식 휴무일은 월요일이지만, 인스타 핫플 가게처럼 종종 다른 요일에 쉬기도 하는데! 그럼 그 새벽에 부랴부랴 택시 회사에 연락해야 하고, 지각할까 발 동동 굴러야 하는데! 게다가 매번 우버와 택시를 타기 부담된다고 충분히 피력했는데! 얼마 받는지 뻔히 알면서! 봐도 훤히 그려졌다. 분명 썬오한테만 물어봤겠지. 출근은 택시로 한다니까 퇴근만 물어보지 뭐, 하면서!

  일전에 썬오에게 오일쉐어를 부탁한 있다. 썬오는 형도 양공장에 다니니 쉬는 시간에 물어보고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뒤로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때는 거절했는데 지금은 받아주는 이유는 주소가 바뀌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퇴근길만 태워주면 돼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내가 있는 줄은 썬오가 유일하다는 것. 그래, 퇴근만이라도 어떠리. 잡히는 우버를 기다리다가 결국 걷기를 택하는 것보다 낫겠지. 나는 얼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안에 뭐가 담겼는지도 모르면서 덥석 물었다. 그렇게 곱창방에는 어색한 웃음이 감돌았다. 마치 인증사진을 찍는 정치인들처럼.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인상 좋은 국밥집 사장님의 두 얼굴>

  썬오와 함께 모래 바람을 맞으며 주차장을 걸었다. 공장 초입 쪽에 멈춰 선 썬오가 형이 곧 데리러 올 거라고 했다. 멀뚱멀뚱 썬오의 형이 오기를 기다렸다. 머릿속에는 가격 생각뿐이었다. 브라이언 차를 탈 때는 일주일에 왕복 기준 25불을 냈으니까, 15불쯤이 적당하겠지? 나는 넌지시 썬오에게 오일 쉐어비를 물었다.

  "30불~!"

  "어?"

  "30불~!"

  귀를 의심했다. 항상 웃는 얼굴의 사람 좋아 보이는 썬오에게서 나온 답이 맞나? 믿어지지가 않아 되물었다.

  "두 명이서?"

  "아니, 각각~!"

  마치 국밥집 사장님이 '옛다, 수육도 같이 먹어~' 했는데 계산서에 떡하니 수육이 찍혀있을 때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닐람(창자방 소속) 남편 뺨치는 날강도 아니야?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 그때 그들이 제시한 금액을 편도로 계산하면 25불이었으니까. 갑자기 푸근하다고 생각했던 썬오의 인상이 돈독 잔뜩 오른 위선자처럼 보였다. 생긴 거와 달리 보통이 아닌 놈이구나 싶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미안한데 너무 비싼 것 같아. 전에는 왕복 기준 25불 내고 탔었어. 편도니까 15불 어때?"

  썬오는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내 썬오의 입은 꾹 닫혔고,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침묵은 권력자만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에, 이 거래의 을을 맡고 있는 나는 조급해졌다. 황급히 아무 말이나 주절대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을 중 을이었다. 썬오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시혜적인 태도로 다시 협상에 임했다.

  "그럼 20불..?"

  이 새끼, 처음부터 목표액이 20불이었던 거 아냐? 어수룩한 얼굴로 차 없는 내 처지를 제대로 이용하는 게 타고난 협상꾼이었다. 왕복 25불 주고 출퇴근했는데, 이제는 편도 20불에 우버비 별도라니. 억울했다. 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얼이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시큼시큼 냄새가 올라왔지만, 그보다 더 시궁창인 건 내 현실이었다.

  "알겠어. 계좌번호 알려줄래? 지금 보내줄게."

  "응, 나는 현찰만 받아~"

  "어..? 나 차 없어서 은행 못 가는데..."

  "괜찮아, atm까지 태워줄게."

  이는 확고한 현찰을 향한 의지였다. 여기서 거역했다가는 거지 같은 플레처에 버려질 것 같았다. 차가 곧 권력인 이곳에서 가장 하층계급에 속한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탈탈 털리기만 한 협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먼지를 풀풀 맞으며 어색하게 썬오의 형을 기다리는데 멀리서 형광 연두색 소형차가 다가왔다. 영화 '마스크'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저것만은 아니길...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통 빗겨 나가지를 않았다.

이해를 돕기 위한 형광연두 차 사진(썬오 형 차 아님/두보에서 찍은 사진 아님)

  모래 알갱이가 뿌려진 낡은 회색 시트에는 쓰레기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잡동사니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겨우 앉을자리를 확보해 몸을 집어넣었다. 무릎이 앞 좌석에 끼다시피 닿았다. 덩치가 큰 썬오가 앉을 수 있게 앞 좌석을 최대치로 뒤로 밀어두었기 때문이다. 혼절하고 싶었다. 깨어났을 때는 한국이기를 바라며. 하지만 그건 로또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바람이었다. 나는 88일을 채우기 전 까지는 이곳을 떠날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나는 썬오 형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는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썬오형은 썬오와 상반되는 분위기를 풍겼다. 인종차별주의자인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더보에 온 이후로 분노의 선이 굉장히 낮아졌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차는 출발했다. 썬오의 형은 운전하는 내내 딸기를 먹었다. 중간중간 콜라를 물처럼 마셔가며.

  그나저나 집주소는 얘기도 안 했는데 어디로 가는 거야? 썬오에게 슬쩍 휴대폰을 내밀었다. 썬오는 형에게 주소를 전달했고, 썬오 형은 답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말을 못 하시는 분인가? 미안함이 몰려왔다. 여기서 얼마나 피해의식만 커졌으면... 그래, 분노와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마음을 정화하자. 비록 차는 좁고 더럽고 형제들은 심상치 않은 데다 가격은 바가지에 현금만 가능하지만, 그래도 편하게 갈 수 있잖아. 뻑킹 두보라고 해서 여기 있는 모든 게 다 나쁜 건 아니야. 그렇게 최면을 걸었다.

  다음날 썬오 형의 차는 윌러스 레인이 아닌 오라나몰로 향했다. 썬오 형제가 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atm에서 돈을 뽑았다. 3.3불이란 터무니없는 금액을 수수료로 떼여야 했다. 차로 돌아와 썬오에게 인당 20불씩, 총 40불은 건넸다. 주말에 꼭 읍내에 가서 수수료 없이 돈을 뽑으리라 다짐했다. 그 이틀을 놓치면 다음 금요일에 또 수수료 3.3불을 써야 했으니까. 그리고 준비성이 최면에서 깨게 하는 신호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술사 썬오 형의 흑마법 시간>

  근면성실의 아이콘 썬오는 출근은 이르게 퇴근은 늦게 했다. 이는 내 퇴근도 썬오에게 맞춰 늦어짐을 뜻했다. 아무리 빨리 뛰쳐나와봤자 무의미한 날갯짓에 불과했다. 썬오는 내가 얼마를 기다리던 전혀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5분, 10분은 예사였고 20분 이상 늦을 때도 있었다. 뙤약볕에서 기약 없이 썬오를 기다릴 때면 찝찝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 9시간 내내 머리망 속에서 짓눌려있던 머리칼은 소가 핥은 것 같았고, 핏물을 잔뜩 맞은 몸에는 몽골 황야의 흙먼지가 끼얹어지고 있었기에.

  아무리 인권이 없는 곳이라도 그렇지 그늘막 있는 휴게 공간도 없냐 묻는다면, 있다. 하지만 거기는 흡연자들에게 점령당해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너무 아파 잠깐 앉았다가도 담배 냄새를 견디기 힘들어 금세 일어나기 부지기수였으니까.

  모래를 먹으며 썬오 형의 차가 얼른 오기만을 바랐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아니다. 거기라도 들어가서 쉬고 싶어서다. 주인공 병에라도 걸린 건지 썬오는 항상 마지막에 등장했으니까!

  드디어 형광연두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역장을 탈출할 때보다 더 잽싸게 차에 올랐다. 처음에나 썬오도 없이 썬오 형의 차에 타기가 어색했지, 몽골 황야라는 극한의 환경에 꾸준히 노출되면 나처럼 되기 마련이다. 기계처럼 썬오 형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썬오 형도 작게 인사를 했다. 말을 하시는 아니라 과묵한 분이셨구나.

  정적이 흐르는 차 안, 속을 끓이며 밖으로 가는 차들을 보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썬오 형이 무언가 쉬지 않고 중얼대고 있었다. 영화 '기담'의 엄마 귀신처럼 쉬는 구간 하나 없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면 장면이 기괴해 보이지 않았을까? 가령 외국어를 배우려고 학습지를 끊었다던가. 오늘이 선생님 오는 날이라 발등에 불 떨어진 수도 있잖아. 나도 영단어를 암기할 'fire 불, firt 불, fire 불...' 계속 반복해서 읊조렸으니까. 아니면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는데 마침 필기구가 없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떤 가정도 흑마법을 거는 어둠의 주술사보다 설득력 있지 않았다. 굿가이와 '뭐야.' '몰라, 무서워' 하며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힐끗 훔쳐봤을 때 룸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으악!'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삼키고 휴대폰에 고개를 처박았다. 다른 의미로 썬오가 기다려졌다.

  썬오 형은 그 후로도 종종 흑마법을 욌다. 주술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주를 직통으로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 눈 감고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가 외던 것은 저주가 맞았는지 더보를 떠난 이후에도 불운은 나를 지독하게 따라다녔다.



  -썬오가 썬오브 비치가 된 사연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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