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쵸 May 02. 2024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34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16

  <탈출까지 D-74~D-64:30대 vs70대의 7세 수준 기싸움 2/인도 집으로 이사>



  <30대와 70대가 미취학 아동 급으로 회춘하는 법>

  노인은 내가 집안 기물을 쓰는 것조차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집 한 채 가졌다고 유세를 떠는 갑호소인이라 할지라도 '세탁기 쓰지 마!'라고 할 자격은 없었다. 집세에 기물 사용비가 포함되어 있음은 세상의 상식과 동떨어진 재클린 드라이브 29에서도 통용되었기에. 그래서 노인은 수시로 빨래를 돌렸다. 세탁이 끝난 후에도 일부러 세탁물을 꺼내지 않았다. 건조기에는 옷 한 장이라도 꼭 넣어두었다. 내가 빨래 돌리는 꼴 보기 싫어서 더 많은 물과 전기를 낭비하다니. 머저리가 따로 없었다.

  세탁기는 사용 중이었고 건조기는 방금 비워졌지만, 세탁도 안 한 옷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좀 있으면 노인이 나갈 시간이었고, 그럼 나는 오늘도 빨래를 못 할 테지. 노인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내 빨래에 손대지 말라고 두 번이나 말해놓고 그들의 빨래에 손댈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사 갈 집에 빨래를 한가득 싸들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집세에 세탁기 사용 비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내가 왜 손해를 봐야 하냐는 말이다. 그것도 노인의 유치한 훼방에 말려서. 이미 나보다 40살 이상 많은 70대 노인과의 전쟁은 시작됐고, 나는 조금도 장유유서 정신을 발휘할 생각이 없었다.

  세탁실에서 느릿느릿 빨래를 갤 때는 언제고 노인은 안방에서 분주히 빨래를 개고 있었다. 문가에서 노인을 불렀지만 노인은 들리지 않는 척 뒤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가는 귀가 먹은 척을 한들 그리 대궐 같지도 않은 집에서 무시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법. 결국 노인은 자기 빨래를 건조기에 돌리라는 조건부로 세탁기 사용을 허락했다.

  노인 나가고 얼마지 않아 빨래가 끝났다. 노인의 축축한 옷가지를 빨래통에 처넣고 내 빨래를 돌렸다. 빨래가 끝나고 건조기까지 돌렸는데 노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옷이 완벽히 마르지 않아 다시 시간을 최대로 맞추고 방으로 돌아갔다. 덮고 자면 가위에 눌릴 것 같은 호랑이 이불 위에서 글을 쓰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노인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빨래통에서 축축하게 썩어가는 빨래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노인과 아손이 귀가했는지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마침내 노인이 젖은 빨래와 조우할 순간이 온 것이다. 내 방은 세탁실 바로 옆인 데다 이 집은 방음이 전혀 되지 않기에 분노가 생생하게 전달되리라. 노인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귀에 꼭 맞게 압축되어 있던 귀마개를 슬쩍 빼냈다. 곧이어 빨래를 확인한 노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뻑킹.. 중얼중얼.. 뻑킹, 뻑킹..!"

  혹여나 방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쿵쿵 심장이 뛰었다. 이 집에는 욕실과 화장실 빼고는 잠금장치가 없기에 미리 대비를 해야 했다. 무기가 될만한 게 없나 주위를 살폈다. 도파민이 폭죽처럼 팡팡 터졌다. 하지만 노인이 누구인가. '너 싫어'란 한 마디에 내게 접근조차 못 하는 찌질이가 아니던가. 노인이 치와와처럼 짖어댈 수 있는 장소는 모니터 뒤가 유일했다.

  노인은 욕을 중얼대며 빨래를 널러 마당으로 향했다. 건조기에는 내 옷들이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그 후로 재클린 드라이브 29의 세탁기와 건조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려야 하기에 나도 노인의 옷을 빼고 사용했다. 노인도 그 사실을 알았을 테지만 모르는 척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는 수동 공격만 할 뿐이었다.


  <모니터 뒤에서만 폭주하는 MZ 노인집에서의 마지막 밤>

  5일간의 노역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지만 에너지드링크를 연거푸 마신 것처럼 각성 상태였다. 마지막날인만큼 브라이언에게 집이 아닌 맥도날드로 가달라고 했다. 더보에서 가장 핫한 곳이자 2시 이후로 유일하게 커피를 파는 곳이기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필리핀 친구들도 금요일의 사치로 맥도날드를 택했는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시저와 또 다른 필리핀 친구가 앞서 갔고, 그 틈에 브라이언슬쩍 내게 다가왔다.

  "재쵸, 미안하지만 인도네 집이 우리 집이랑 너무 멀어서 오일 쉐어 더는 하기 힘들 것 같아."

  우물쭈물 대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브라이언에게 달리 뭐라고 하겠는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그간 정말 고마웠다고 하는 수밖에. 사실은 너무 막막하고 갑갑하고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고맙다는 말만은 진심이었다. 브라이언과 친구들 덕분에 헌팅 스트레스 없이 지낼 수 있었으니까. 다시 오일 쉐어를 구해야지. 어떻게든 될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정신승리를 뒷받침하듯이 지평선 너머로 무지개가 떠있었다. 가든 여인숙을 떠난 게 엊그제 같은데 3주 만에 또 이사를 가는구나. 3개월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하루하루가 모여서 오늘에 다다랐듯이, 결국에 종착지는 올 것이다. 그 복선이 무지개라고 믿고 싶었다. 그때 노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이틀 치 돈 돌려주면 오늘부로 렌트 끝나는 거 알고 있지? 돈 보냈으니까 열쇠 바로 반납해.'

  돈을 이체한 화면을 찍은 사진과 함께. 표준 호주인의 지능을 불신해 직접 계산까지 해서 금액을 알려줬건만, 노인은 자체적으로 끝자리 떼기를 시전 했다. 0.86불, 한화로는 756원! 센트단위까지 송금이 가능한데도 굳이 절삭해서 주는 치졸함! 반올림을 해도 0.9가 되는 법인데 저 근본도 없는 계산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오늘부로 렌트가 끝이라니? 내 이사 예정일은 내일인데 당장 나가라는 거야, 뭐야?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싸움을 극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걸어온 싸움은 피할 수 없기에 도파민이 싹 돌았다. 이제 '더 빨리 쫓겨나고 싶어?'가 통하지 않는 시점이었기에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 타자를 쳐내려 가는 내내 내 눈은 광기로 번득였다.

  '그건 이틀 치가 아니지. 86센트는 어쩌고? 게다가 오늘이 토요일도 아닌데 나가라고? 그럼 3일 치 돈 내놔.'

  '오늘 렌트 끝난다고 한 거지 오늘 나가라고 한 거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렇게는 못주지. 86센트는 줄게. 근데 네가 똑똑해지려고 들면 86센트가 아니라 85센트가 될 거야. 내가 전에 말했지, 나한테 똑똑한 척 굴지 말라고.'

  1센트, 그러니까 8원을 받기 위해 벌벌 기라는 협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8원으로 생색내며 뱉기에는 너무 짜치는 대사였다. 하지만 호주 하층민에게 돈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이었는지 노인은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했다. 밥 먹고 키보드 배틀만 떴는지 와르르 쏟아지는 문자 속도를 따라 잡기가 힘들었다.

  '너한테 3일 치 빚진 적 없거든.'

  출력한 송금 내역서 위에 동전을 쪼르륵 배치한 사진, 곧이어 문자가 들어왔다.

  '이거 니 돈.'

  사진 속 동전은 정확히 85센트였다. 끝자리 절삭하려던 거 아닌 척할 때는 언제고, 끝끝내 1센트를 떼고 주다니. 참고로 호주 동전 가장 작은 단위는 5센트다. 동전으로는 줄 수도 없는 1센트를 착하게 굴면 주니 마니... 내가 100원 줄 테니까 좆이나 까쇼.

  '그리고 또 하나, 누가 너한테 내 와이프 드라이기 쓰라고 했어!'

  급발진이 치와와급이었다. 집에 있는 물건 자유롭게 쓰라면서 드라이기 위치도 직접 알려줬던 것쯤은 간편하게 잊는 지능이라니. 뇌 빼고 살기의 표본이었다.

  '명심해. 토요일 10시까지다.'

 카리스마 민호, 최민수 빙의한 치와와... 여러 자아를 뒤집어쓰던 노인이 마지막으로 택한 건 대부의 보스였다. 내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동안 키보드 배틀은 노인의 비장한 최후통첩으로 막을 내렸다. 모니터 뒤에서만 강해지는 MZ 노인을 따라잡기란 어지간한 네티즌 경력으로는 어림없기에...


  <희망을 품고 환승이직한 회사에는 다른 종류의 개 같음이 있음을>

  40분 이상을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 노인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낡디 낡은 베트남 부인의 시끄럽기만 한 저출력 드라이기와 함께... 그렇게 조용히 마지막 날 밤이 지나갔다.

  아침부터 세탁기와 건조기가 동시에 돌아갔다. 노인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티가 났다. 처음 이사 온 날이 떠올랐다. 트렁크에서 내 캐리어를 꺼내준 노인이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었다. 팔을 붕붕 돌리고 어깨를 두드리다가 끝내는 약을 털어 넣었다. 일부러 티 내려고 저러나 싶을 정도였어서 '나갈 때는 직접 옮겨야겠다' 다짐했는데 현실이 됐다.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한국에서였다면 그들과 엮일 일조차 없었을 테니까. 폐급이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 노인도, 태어나보니 아빠가 할아버지인 아손도, 푼돈에 팔려온 베트남 부인도... 서로의 욕망이 맞아떨어져 상부상조하는 호주 하층 계급에 불과했다. 하지만 덕구만은 달랐다. 내내 방치되어 지냈으면서도 사람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어린 개를 어떻게 연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덕구에게 필요한 건 외국인 개도둑이 아닌 크리피 가족이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덕구의 세상도 그들이었다. 이 집에 벼락이 내려도 너만큼은 무사하길. 잘 살아라, 덕구야.

  재클린 드라이브 29의 문이 닫혔다. 짐은 3주 전보다 더 늘어났고, 상황은 막막했지만 날씨만은 더할 나위 없었다. 때맞춰 우버가 도착했고 우버 기사는 가뿐히 짐을 실어주었다. 노인의 엄살 퍼포먼스가 그 위로 겹쳐졌다. 우버에 올라 노인에게 작별 선물로 문자를 남겼다.

  '제발 손녀뻘 되는 여자애 몸에 손 좀 대지 마. 그리고 남의 속옷 주물럭대는 것도 하지 말고. 그거 성범죄야. 나한테 문제가 뭐냐고 했지? 니 크리피하고 역겨운 행동, 그게 문제야. 어쨌거나 이 조언 새겨들어. 니 나이에 감옥 가면 오래 버티기 힘들잖아. 그리고 잔돈 1센트는 가져.'

  문자에 담긴 것보다 내 증오는 뜨거웠고 역겨움은 선명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파서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기에 복수를 다짐했다. 더보를 뜨는 날, 노인을 파멸시키리라. 복수심은 마약 같아서 때로는 지옥 같은 더보살이를 견디게 해 주었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를 좀먹었다. 그렇게 망가진 내 마음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도둑에도 급이 있다>

  큰걸 훔치면 대도가 되어 이름이 남고, 작은 걸 훔치면 좀도둑이 되어 유치장에 간다. 사연 없는 도둑 없듯이 그들에게도 동정의 여지는 있다. 생활고로 어쩔 수 없이 절도를 했다거나 굶고 있는 아기 때문에 분유를 훔친 경우... 반면에 어떤 이유로도 미화가 불가능한 영역도 있다. 속옷 도둑. '생활고 때문에 남이 입던 속옷을 훔쳤어요', '집에 굶고 있는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팬티를 훔쳤습니다...' 이유를 대면 댈수록 음침해 보일 뿐이다. 갑자기 속옷 도둑 얘기는 왜 하느냐 묻는다면, 노인이 내 속옷을 훔쳤기 때문이다. 똑같은 색깔과 똑같은 모양의 브라 두 개를.

  처음부터 노인을 의심했던 건 아니다. 되려 '어디 있겠지' 하고 가볍게 넘겼었다. 하지만 빨래를 하거나 옷 정리 할 때마다 찾아봐도 통 나오지를 않았다. 워홀기 초반부에도 썼듯이 나는 호주에 턱 없이 적은 양의 속옷을 들고 왔다. 가뜩이나 속옷이 부족한데 있던 것 마저 사라지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똑같은 색깔, 똑같은 모양의 브라가 동시에 사라지는 게 가능한 일인가? 의심이 싹트자 찝찝하고 답답한 마음은 커져갔다. 종래에 영화 '가스라이팅'의 주인공처럼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행 가서 잃어버렸나? 아닌데, 브리즈번에서도 입었는데. 심지어 여기서도 입었잖아.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러다 불현듯 기억 한 조각이 스쳐갔다. 세탁실 한편에 건조를 마친 옷감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공간, 가장 상단에 있던 베트남 부인의 짙은 남색 브라. 그때 '내 거랑 비슷하네...'라고 무심코 생각했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모든 정황들이 짜 맞춰졌다. 노인이 범인이다!

  아마 그 날일 것이다. 노인이 내 빨래를 멋대로 건조기에 넣었던 날. 마침 무슨 빨래를 돌렸는지 한눈에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빨래 양이 적었던 데다 대부분이 속옷이었다. 속옷을 건조기로 옮기던 노인은 검정 브라 두 짝을 발견하고 '베트남 부인 게 섞여 들어갔다' 생각했으리라. 그렇게 손녀뻘의 브라를 훔쳐 딸뻘 부인에게 주었겠지. 비싸고 질 낮은 공산품의 나라 호주에서 이 얼마나 가성비 넘치는 선물법인가. 물론 단순히 노인의 취향이어서 탐낸 걸 수도 있지만. 덕분에 내 아이템 바구니 속 브라 개수는 -2가 되었다. 그래, 1센트도 너 하고, 브라도 너 해라.


작가의 이전글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3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