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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쵸의 와장창창 미국 서부 불나방 여행 12일 차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는 엔딩이 오지 않기에

by 재쵸

<미국 여행 12일 차:베가스 스트립/플라밍고 호텔/베네치안 호텔/고서 전문 서점/한식당 강남/벨라지오 분수쇼+달빛>



<시작부터 꽉 찬 베가스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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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에 누가 5일이나 있냐'는 말이 떠오르는 마지막날 아침, 할 것도 없는데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은 밤 10시 50분이었다. 호텔 로비에 짐을 맡기고 거리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낮에 시내를 여유롭게 구경한 적이 없었다. 하늘은 청량했고 거리는 활기찼다. 다른 도시들보다 호객꾼들과 행위 예술가들이 많았다. 베트맨이나 미니언즈 같은 영화 캐릭터부터 쌈바옷을 입은(안 입은 것에 가까운) 여자들까지. 꽤 쌀쌀했는데 힘든 기색도 없이 웃는 얼굴에서 프로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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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인 베네치안 호텔까지 가는 길, 공연도 구경하고 아직 못 가본 호텔이 있으면 들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소울 가득한 노래를 부르던 가수였다. 관객도 흥이 넘쳐 덩실덩실 리듬을 타며 팁을 냈는데 그마저도 공연의 일부처럼 보였다. 달러가 많이 남아 팁을 뿌리고 다녔지만 그들에게는 진심으로 우러나 팁을 줬다. 그러자 가수가 내게 마이크를 건넸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게 어색했다.

공무원분에게 오늘 일정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중간 지점인 플라밍고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공무원분을 기다리는데 자꾸만 슬롯이 당기고 싶었다. 마지막날 카지노에서 기부천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여태껏 한 번도 잃은 적 없잖아. 결과적으로는 원금 회수를 했으니까. 그래, 땡기고 가자! 어쩌면 잭팟의 주인공이 될지도 몰라. 그렇게 20불이 6.27불이 되는 기적이 펼쳐졌다. 기기를 바꿔서 재도전했다. 10판 무료가 당첨돼서 마이너스 8불까지 회복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대가로 나는 씁쓸하게 슬롯머신을 떠나야 했다.


<LA와 베가스의 수미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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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분이 도착했다. 미련이 질척대는 발걸음으로 플라밍고 정원에 갔다. 날씨 때문인지 플라밍고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정원이 예쁜 것도 아니어서 동선이 안 맞는데 굳이 찾아올 필요는 없어 보였다. 호텔을 빠져나와 같이 스트립을 걸었다. 스코틀랜드 복식의 남자가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감상하고, 베트맨으로부터 예쁘다는 말도 들었다. 큭큭큭. 그런 말은 원래 하는 거라고요? 뭐 어쩌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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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안 호텔은 여태껏 갔던 곳 중 가장 특색 있었다. 물줄기 위에서 뱃사공들이 쪽배를 몰며 노래를 부르는 풍경은 조악한 인공 하늘마저 낭만적으로 보이게 했다. 수면 아래에는 많은 이들의 염원을 동전들이 빛났다. 나는 1센트 동전 두 개를 꺼내 하나를 공무원분에게 건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똑같은 소원을 빌었다. 내 소설의 세계관 완성하기와 소울메이트 만나기. 경쾌한 포물선을 그리며 동전이 수면 아래로 잠겼다. 훗날 거금 2센트 주고 빈 소원이 언제 이루어지나 얘기했을 때 스투시는 이렇게 말했다.

'2 센트면 오히려 화를 부를 듯.'

그렇게 지루한 일상을 보내며 소원을 빌었단 사실을 잊고 지냈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는 스코티시를 알게 되고, 다시 한 달 뒤에는 그가 내 소울메이트임을 직감하게 된다. 베네치안에서 거금 2센트(엄밀히는 1센트)를 주고 빈 소원은 이루어진 걸까? 아니면 화를 입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걸까? 결과는 내년 1월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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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근처에 전통 복식을 입은 사람들을 따라가니 무대가 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젤라또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산 뒤에 자리를 잡고 공연을 감상했다. 두 차례의 공연이 끝나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무대로 올라왔다. 이어서 공연을 하려나 싶어 기다렸지만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우리는 호텔 내에 있는 서점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일반적인 서점이 아니라 고서만 취급하는 곳이었다. 들어가도 되나 싶어 조심스러웠는데 다행히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책을 만지거나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일반 서점보다 더 흥미로운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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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ENFP와 부자 씨가 추천해 준 한식당 '강남'에 가기로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아 스트립에서 걸어가기로 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베가스 스트립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앞니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춤꾼들부터 열정적으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할머니까지. 팁을 받은 할머니는 목으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무아지경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건강도 챙기고 돈도 벌 수 있는 베가스는 창조 경제의 도시임이 분명했다.

강남까지 가는데 걸린 40분, 왜 미국인들이 차를 타고 다니는 가에 대해 깨닫는 시간이었다. 신호도 없어서 무단횡단도 여러 번 해가며 겨우 도착했을 때 어두운 가게 내부와 마주쳤다. 영업을 안 하는 건가? 튀어나오려는 욕을 안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간신히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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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강남 세트를 주문했다. 해외에서 파는 한식은 한국에서 파는 것보다 별로인 경우가 많은데 강남은 한국과 비교해서도 맛이 있었다. 그리고 직원들도 무척 친절해서 버터에 비빈 마늘도 서비스로 챙겨주셨다.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다 먹었을 텐데 짐을 찾으러 스트립에 돌아가야 했다. 내가 우버를 부르는 동안 공무원분은 생고기를 포장했다. 구워서 싸간다는 생각을 당시에는 미처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무원분은 내일 LA로 떠나야 해서 다음 날 저녁에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다행히 LA의 강한 햇볕에도 고기가 잘 견뎌주었다고 한다.


<달빛, 분수, 밤>

여행의 마무리가 다가왔다. 떠나기 전에 벨라지오 분수쇼를 보며 달빛을 듣고 싶었다. 걸어서는 40분이 넘게 걸리던 거리가 차로는 무척 가까웠다. 분수대 앞에 내려야 하는데 차는 벨라지오 호텔 지하로 내려갔다. 말문이 막혀 어버버 대다가 겨우 스탑을 외쳤다. 우버 기사분은 벨라지오 호텔 출입구까지는 더 가야 한다며 의아해했다. 분수쇼를 보고 싶다고 하고 싶었으나 분수가 영어로 뭔지를 몰랐다. 고심 끝에 떠올린 '워터쇼!'를 내뱉고서야 겨우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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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을 뛰어 올라갔을 때 쇼는 거의 끝나 있었다. 다음 쇼를 위해 명당자리를 탐색했다. 측면 자리를 잡고 기다리니 경쾌한 음악과 함께 분수가 물을 뿜었다. 어두운 물결 위로 빛나는 물들이 뿌려지는 모습은 라스베이거스에 호텔 말고 볼 게 없다는 말을 잊게 했다. 하염없이 넋을 놓고 있는데 어느새 쇼가 끝났다. 우리는 다음 쇼를 위해 이번에는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베가스에 5일이나 있었지만 분수쇼를 달빛과 함께 즐긴 적은 없었기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쇼가 시작될 때 바로 재생할 수 있도록 음악을 준비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달빛과 함께 분수쇼를 감상했다. 베가스는 미디어에서 자주 다뤄지지만 내게는 매력이 부풀려진 도시였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더할 나위 없었다. 종종 분수쇼를 봤던 그날 밤이 떠오를 때면 오션스 13 엔딩만큼이나 완벽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공연이 끝났다. 여운에 젖은 산뜻하고 조금은 벅찬 기분, 공무원분도 같은 기분인 듯했다. 그도 나도 베가스에서 분수쇼가 가장 가치 있다고 꼽았으니. 그는 아까 젤라또를 얻어먹었으니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하지만 짐을 찾고 공항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우버비 환율 잘 쳐서 입금해 주세요. 저 차단하지 마시고요."

공무원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우리는 분수대 앞에서 인사한 뒤에 각자의 길을 갔다. 다음이 없음을 앎에도 웃으며 헤어지는 건 얼마나 산뜻한가.

새삼 우리가 다시 보게 된 게 얼마나 신기한가에 대해 곱씹었다. 학생과 식사 동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공무원분과도 다시 보지 못했겠지. 선택과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가 만들어낸 지금은 어찌나 완벽한가. 물론 예정대로 혼자였어도 최고의 여행을 했으리란 걸 안다. 하지만 한식당까지 걸어가거나 고급 레스토랑을 가거나 현지인도 꺼린다는 지하철을 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함께한 사람들만큼이나 다채로워진 이번 여행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잘 먹고 잘 놀다 갑니다>

짐을 찾고 공항에 가는 길, 우버 기사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나는 영어가 아님이 반가워 냅다 한국어를 시전 했고,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가는 동안 주로 책 이야기를 했는데 우버 기사는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좋아한다고 했다. 마침 나도 좋아하는 작품이라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골룸이고, 해리포터에서는 론 엄마."

"너 진짜 특이하다..."

그의 말을 알아는 들어도 대답을 뱉는 데 있어 자꾸 한계에 봉착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라고 하자 그는 '내 한국어보다는 잘하잖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고등교육받았는데 당연히 '안녕하세요' 수준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말을 구현할 능력이 없었기에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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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터미널에서 대기하다가 체크인을 하러 갔다. 배가 조여 지퍼를 푸르고 있었는데 담당 직원이 코트를 벗으라고 했다. 눈치를 살피며 주섬주섬 지퍼를 다시 올렸다. 다시 숨 쉬기 힘들어진 채로 신발을 벗었다. 스타킹에 구멍이 잔뜩 나 있었다. 사람 발이 아니라 매 발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순조롭게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내 느낀 거지만 새삼 이번 여행을 하게 된 게 신기했다. 마치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여기로 이끈 것 같았다. 무모하다면 무모하고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조기 퇴사와 뜬금없는 미국 여행, 소울메이트 찾기란 원래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보다 많은 것을 얻었다. 인생이 지루하다 못해 고여서 썩고 있다 느끼던 차에 온 여행지에서 내 세상이 180도 바뀔 줄이야. 계획대로 된 건 하나도 없고, 버킷리스트로 몇 년을 꿈꿔온 것들은 엉망이었으며, 절대 안 한다는 짓은 골라서 했지만 그래서 더 유의미했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애아부지랑 가기로 했던 모하비 사막은 끝내 버킷리스트로 남겨야 했고, 로맨스도 일절 없었지만 그렇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언젠가 나는 소울메이트와 모하비 사막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장롱면허를 탈출해 혼자 훌쩍 떠날 수도 있다. 어쩌면 바그다드 카페를 버킷리스트에서 삭제할지도 모른다. 결말을 모르기에 더 이번 여행을 추억하겠지. 여지를 남긴다는 건 그런 거니까.

확실한 건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리란 것이다. 그랬다면 12일간의 특별하고 유일한 경험들은 펼쳐지지 않았을 테고, 내 여행에 동행해 준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인생은 언제나처럼 '어떤 특별한 순간'을 기다리는 연속이었을 테지. 비록 퇴직금과 연차수당을 포기했지만 무모한 결정이 이끈 모든 순간 속에서 많이 행복했다. 게다가 늘 마음의 짐이던 뉴욕 수녀원 사람들에게 사진 보내기를 실천하기도 했다. 이제 뉴욕 여행을 회상할 때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 대신 안부를 묻기 잘했다는 뿌듯함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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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큰 폭풍을 불러일으키듯이 애아부지가 불러일으킨 날갯짓이 내 고집스럽고 단단한 알에 금이 가게 했다. 앞으로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리라. 그렇게 나는 무모하고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지금'에 존재하겠지.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는 엔딩이 오지 않기에>

끝으로 내 미국 여행을 더없이 완벽하게 채워준 모두에게 감사를 올린다.

마리 사장님, 민박 사장님, 유니버셜 동행, 공무원분, 엔지니어 친구, 출장 오신 분, 캐나다 워홀러, 현지인, J4, 군필, 가이드, 샌디에이고 투어 가이드 알렉스, 스투시, 체대생, 디즈니 동행, 디즈니 동행 언니분, ENFP, 미국 고인 물, 우성이 형, 뉴비, 절친 1, 절친 2, 앞니 없는 거지, 부자 씨, 학생, 베가스 클럽 엠디, 제이슨, 네이마르, 캐년 투어 가이드분과 투어원들, 그리고 애아부지...



<와장창창 미국여행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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