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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Mar 03. 2024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31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13

  <탈출까지 D-76:제1차 빨래 사건 발발/강퇴 요청>



  <괴식 제조기의 집은 건조기와 다름없다>

  세탁기 속에서 젖은 빨래가 썩어간지 얼마나 지났을까? 건조기의 뿌연 창 너머에는 내가 빨래를 돌리기 전부터 있던 옷들이 그대로였다. 70년대 터프가이스러운 노인의 옷과 아손의 캐릭터 옷, 중년 여자 옷... 교집합 없는 세 부류가 한데 묶인 배경을 알기에 괴식 하는 장면을 본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과 라면을 따로 먹으면 아무 문제없지만 비벼 먹으면 역겨운 것처럼. 나는 굳이 베트남까지 가 여자를 사 와 괴이한 조합을 만든 노인에게 말 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요일 저녁은 나를 노인에게 내몰았다. 누군가에게는 시작이지만 양공장 노예들에게는 노역을 위해 자야 하는 시간이기에.

  크리피 가족은 한 공간에 있었지만 유대를 공유하는 가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 부인은 집안일을 하느라 바빴다. 아침부터 밤까지 주 7일을 일하지만 나는 그가 집에서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늘 노인의 수발을 들고 있었기에. 아손은 음량을 최대치로 튼 휴대폰에 빠져 있었다. 노인은 다 죽어가는 송장임을 증명하듯 멈추지 않는 잔기침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 놀러 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1촌 관계였다. 아무리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졌다지만 이게 어딜 봐서 정상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마치 심즈 속 심 같았다. 본인들이 게임 캐릭터라는 사실을 평생 모른 채로 그저 존재할 뿐인 심. 재클린 드라이브 29번가는 일종의 거대한 건조기였다. 그들만으로 충분히 기괴한 이곳에 온 죄로 나는 건조기 속에서 그들과 부대껴야 했다.

  모르는 아무 노예나 붙잡고 헌팅을 할 때보다 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 젖은 빨래는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고, 나는 어느새 노인 앞에 서 있었다.

  "나 건조기 돌려야 하는데 빼줄래? (개색갸)"

  "오케이, 내가 금방 비워주겠다구~"

  노인에게 내내 드리워있던 죽음의 그림자가 가셨다. 한껏 신난 노인은 세탁실로 향했고 나는 그 뒤를 따르며 온갖 거주를 퍼부었다.


  <상식의 범주가 아무리 넓어도 재클린 드라이브 29와는 동떨어져있다>

  글을 쓸 때 되도록이면 밈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당시에야 재밌을지 몰라도 유행이 지난 밈은 조소조차 자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이 세탁실에서 한 행동은 '킹 받는다' 외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노인은 건조기에서 옷을 한 장씩 꺼내서 갠 뒤 세탁기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이 과정 내내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얼굴이 웃으면 더 찌그러질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개고 나서 비워주겠다구~ 조금만 기다려~"

  개색기가... 얼핏 봐도 꽉 찬 건조기 안, 다 개려면 족히 10분은 걸릴 것 같았다. 와중에 노인은 중간중간 내게 말을 거는 것이 공정의 일부라도 되는 양 성실히 이행했다. 나는 말 섞어주는 봉사를 하기에는 비위가 약하고 분노의 역치가 낮았다. 베트남 부인처럼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지 않는 한, 노인과 3초 이상 있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빨리 건조기나 비우고 꺼지기 바랐지만 그는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꿋꿋하게 세월아 네월아 빨래를 갰다. 이 집에서 여러 번 상식이 붕괴됐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기행에 적응되지 않았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노인과 마주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 때쯤 세탁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건조기 속에서 돌고 있는 내 속옷들과 조우했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재클린 드라이브 29번가의 상식은 세상의 상식과 이다지도 다른가. 개인주의 서양에서 왜 자꾸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지? 시골이라서? 단순한 늙은이의 오지랖인가? 하지만 무엇으로도 그가 왜 그랬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일전에 빨래를 돌리고 외출을 한 적 있다. 그때 노인에게 대신 건조기를 돌려주겠다는 문자가 왔었다. 내가 거절하자 노인은 내 빨래 때문에 세탁기를 못 쓴다며 불평했었다. 적어도 그때는 남의 물건을 멋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집에 있는데도 내 옷이며 속옷을 멋대로 만진 것이다. 당장이라도 부정탄 브라와 팬티를 불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팬티 없이 시작한 호주살이 초기를 생각하면 참아야 했다. 출국 직전까지 마르지 않은 팬티를 '호주 가서 사지, 뭐!' 라며 버린 죄는 혹독했기에. 그 덕에 한 번 입고 버리려고 챙겨 온 끈에 가까운 야한 팬티로 연명했었다. 호스텔 전등에 세탁한 끈을 주렁주렁 널어서 마르면 입던 불우했던 날들... 한 달 만에 큰맘 먹고 산 호주산 새 팬티는 어찌나 비싸고 후졌던가. 제대로 된 게 없는 호주 때문에 나는 노인이 주물럭댄 속옷들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너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어 한 명쯤 있다면 그건 네 엄마야>

  한 순간도 이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사 가지 않았던 건 시골에서 이사란 단순히 집만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헌팅을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걸 상쇄할 만큼 괜찮은 집이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탈출까지는 고작 두 달 남았는데 대부분의 집에는 최소 거주 기간이 존재했다. 더보에서는 언제나 수족이 묶이고 재갈까지 물린 것 같았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처럼,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열어보지 않아도 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문 너머에서 노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빨래 한 장씩 개기 전법으로 날 세탁실에서 퇴치했고 내가 없는 틈에 손녀뻘인 내 속옷을 주물럭댔다.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은 건지 이제 내 방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가지가지 행보로 내 복장을 뒤집으려는 걸까? 그냥 꺼져줘, 제발... 하지만 이곳은 뜻대로 되는 게 없는 더보, 문이 열렸다. 노인의 거무죽죽한 시체빛깔 피부는 평소와 달리 상기되어 있었다. 그 얼굴 위로 관심 있는 여자애 근처에서 얼쩡대는 남초딩같은 표정이 겹쳐 보였다. 노인은 의기양양하게 구글 번역이 틀어진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나는 당신의 옷을 세탁했습니다. 종료 예정 시간은 9시 45분입니다.'

  분명 지금 내 얼굴에는 떨떠름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읽지 못하고 칭찬받고 싶은 아이처럼 내 반응을 기다렸다. 그 순간 나는 노인이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법도 모르고, 맺어본 적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 연장선으로 베트남에서 부인도 사 왔으리라. 그게 비참한 삶의 정점을 찍은 줄도 모르고.

  노인이 내게 범했던 무례에 악의가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되는 건 아니다. 노인은 나를 한심한 머저리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으니까. 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을까? 곱씹다 보면 원인 제공자인 노인은 쏙 빠지고 내가 도마에 올라 있었다. 그렇게 상황을 가정하고 스스로를 재판하고 경멸하고 분노하기를 반복해 왔다. 노인의 1차 가해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2차 가해가 더욱 잔인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설사 그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될지라도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작은 행동이라도 해야 했다. 나조차 나를 방치한다면 아주 오랜 후회로 남을 테니까.

  "나 니가 내 빨래 건드린 거 싫어."

  내 분노는 이보다 컸지만 영어는 번번이 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말하는 편이 어눌해 보이기 싫어 참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전에 유학원 사장님이 해준 말이 있다. 불합리한 상황에서 영어를 잘 못한다고 참으면 안 된다고. 적어도 '유 아 배드' 라도 말해야 한다고. 그럼 그 사람도 본인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걸 알 거라고. 그 말대로 노인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했다. 영문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번역기에 쓰여있는 말을 반복했다.

  "내가 빨래 대신 돌려서 끝나는 시간 알려주려고 한 건데.."

  "그냥 니가 만진 게 싫다고. 거기 내 속옷도 있잖아."

  "걱정 마. 속옷은 와이프한테 하게 시켰어. 내가 안 했어."

  너..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하지만 노인은 억울하다는 듯 '본인은 속옷을 제외한 빨래만 만졌고, 속옷은 베트남 부인에게 시켰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내가 집에 없었더라면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내가 집에 있는데 왜? 게다가 속옷은 같은 여자인 베트남 부인에게 맡겼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미 노인은 몸에 멋대로 손댄 전적이 있기 때문에. 모든 정황이 그가 의식의 흐름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가리켰다. 30살 어린 베트남 부인을 졸렬하게 팔아가면서까지.

  "아니, 싫다니까. 싫어. 그냥 싫어. 싫어!"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 감정을 원색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버러지 보듯 경멸 가득한 표정으로 나는 '싫다'라고 염불을 외웠다. 노인은 여유로운 척 웃으며 도망쳤다. 끝까지 추잡스럽게 '노 워리'와 베트남 부인 탓을 번갈아 하면서. 그를 향한 내 구역감의 극히 일부밖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벌써 꽁무니를 빼다니. 고작 저 정도밖에 안 되는 놈 때문에 나를 비하했다는 게 허탈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 나랑 내 와이프는 너한테 잘해주려고, 도와주려고 했어. 근데 도무지 안 되네. 미안하지만 다른 살 곳 알아봐.'

  이 씨벌롬이... 감히 나를 강퇴하다니.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당장 내일... 아니, 9시간 뒤면 출근이었다. 대체 언제 집을 구하고 이사를 가란 말인가.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도 내 사전에 아쉬운 소리란 없다. 최대한 빨리 집을 구해서 노인의 뒤통수를 치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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