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은 친구들을 ‘나의 나’라고 표현했다. 21년은 나의 나들이 곁을 주고 시간을 내어주는 바람에 내가 나일 수 있었다고 쓰고 싶다. 어떤 점에서는 반드시 꼭 내 쌍둥이 같은 나의 나들.
최근에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연달아 두 번 접했다. 하나는 SF영화고, 다른 하나는 소설책이다. 영화 <백조의 노래>를 애플 TV에서 보았을 때, 나는 막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결말부를 읽다 만 참이었다.
소설은 알파벳의 순서만 뒤바꾼 이름을 가진 쌍둥이,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의 이야기다. 늘 함께 하던 유년기 때와 달리, 클라우스와 떨어진 루카스는 끊임없이 뭔가 결핍된 듯 타인에게서 무엇인지도 모를 어떤 것을 채우려고 한다. 내 세상 안에서 나만의 법칙이 정립되어 있던 유년기를 지나 세상의 각진 규범 안에 가둬질 때, 그 각진 모양에 가둬질 수 없는 내 안의 ‘클라우스(결핍)’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의 심연이 되어 우리를 괴롭힌다.
<백조의 노래>에서 주인공의 캐머론의 아내 파피는 쌍둥이 형제 안드레를 사고로 잃었고, 이 상실감은 파피를 공허의 심연으로 빠뜨렸다. 그녀가 이 시련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캐머론은 불치병에 걸린 자신을, 건강한 복제인간으로 대체해 행복을 이어나가려고 한다. 이때 파피가 잃은 것은 자신의 쌍둥이이고, 자기도 모르게 되찾는 것은 남편의 쌍둥이이다. 파피의 쌍둥이, 즉 클라우스가 떠난 빈자리는, 다른 클라우스가 채워나간다.
그렇지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3부에서 화자는 순식간에 루카스에서 클라우스로 바뀐다. 책의 도입에서부터 내내 이야기하고 있던 인물은 클라우스, 즉 결핍 그 자체이다. 결핍은 우리를 이야기하게 한다. 결핍된 자신은 늘 온전함을 찾으려 한다.
유년기에 우리는 뾰족뾰족한 루카스와 클라우스를 다 갖고 있다. 성인이 되어 세상의 각진 모양에 가두어질 수 없어 클라우스가 떠나면, 루카스는 안이 텅 비어버린 뾰족한 그 공허를 맞닥뜨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 종일 외로워한다. 결핍은 연결에의 의지를 낳고, 철자의 순서만 다를 정도로 비슷한 나의 나들에게 이야기를 청하고, 건넨다.
올해에도 나의 나들이 내 결핍을 확인시켜주었기에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는 순간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었고, 영원이 못 될지라도 연결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의 나들아, 서로의 어깨 위에서 결핍을 나누자. 남은 시간에는 더 많이 들어줄게. 이야기를 청하고 그 이야기에 또 빚질게. 그 빚은 내가 빚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로 갚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