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딥마고 Jan 02. 2024

세상엔 모르는 것 천지

지루하면 죽는다는데 잘 됐다

아빠는 과학자다. 나는 일찍이 문과생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아빠의 방에 들어가면 다른 나라에 온 기분이 들었다. 원자, 전자, 핵물리학 같은 단어들의 위엄은 혀를 쑥 내민 아인슈타인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는 걸로 겨우 상쇄가 됐다.

2023년 마지막 날에 아버지와 15분 정도 통화를 했다. 얼마 전에 사드린 매크로 렌즈로 시작한 대화가 오펜하이머를 지나 양자역학으로 흘렀다. 아빠는, 양자역학이 시사하는 건 인간이 얼마나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지 알게 된 것뿐이라는 말로 대화를 마쳤다.


우연처럼 이 주제는 근래의 독서로 이어져 의미를 더하게 됐다. 조나 레러의 <지루하면 죽는다>. 24년 첫 책으로 이 책을 기록하게 되어 기쁘다. 에드가 앨런 포나 드라마 <로 앤 오더>, 해리 포터 시리즈, <대부>나 <소프라노스>처럼 성공한 이야기들에 숨은 미스터리적 요소를 파헤치면서 스토리텔러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처럼 시작하더니, 삶에 불확정성을 더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설파하면서 끝맺는 멋진 흐름의 책이었다.

http://aladin.kr/p/hQ8ub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는 모호함,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경기, 문제 풀이 과정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우리를 구원할지니. 삶을 대할 때 정답을 구하는 가장 빠른 길을 찾거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결과중심적 사고보다, 알 수 없는 세상 그 자체의 미스터리를 즐기는 것이 충만한 삶의 비법이라는 내용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건 그러니까 축복이다.

비대한 자아는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걸 우리는 안다. 최근에 펜팔이나 글쓰기를 위한 인터뷰 프로젝트처럼 고의적으로 낯선 대화의 현장에 나를 노출시키는 경험은 자아의 무게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곤 했다. 타인은 그 자체로 복잡한 우주이며, 그 앞에서 자아는 보기 좋게 단출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24년은 무엇도 맞지 않고 무엇도 틀리지 않은 답을 가진 질문처럼 맞이하고자 한다. 저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처럼.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아직 새것인 상태로 책장에 책들이 스무 권, 서른 권 쌓인다. 산 지 오래된 책들도 표지를 보면 설레곤 한다. 한 번에 다 읽으면 재미없지. 책 말고도 들을 것 볼 것 쓸 것 해내야 할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아빠 말대로 세상은 무한한 미스터리 덩어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