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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May 28. 2019

아날로그 감성의 정석, <봄날은 간다>

우리들은 은수도 아니었고, 상우도 아니었지만

전 애인의 SNS를 훔쳐 보게 되는 영화                          



            

 영화를 보고 나서, 전 애인들의 SNS와 카톡 프로필을 찾아봤다. 영화를 보면서 그 사람들이 생각났다거나 비슷했다거나 겹쳐 보였던 건 아닌데, 그냥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떻게 사나, 잘 살고 있나 싶어서.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 연락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고,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하는 식의 재회를 그리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나 정도는 궁금해질 정도로 휘리릭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기억이라기보다는, 그 감정들이 밀려온 쪽에 더 가깝겠다. 이 영화는 그런 묘한 힘을 가진 영화다. 우리들은 상우도 아니었고, 은수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배우가 연기한 은수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라면 먹을래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를 비롯해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대사들을 남긴 영화지만, 개인적으로는 대사만으로 담을 수 없는 장면들이 좋았다. 잡아끌고 헝클어뜨리는 손짓들과 눈빛들, 가까워진 거리. 은수씨, 상우씨 부르는 부드러운 존댓말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나오는 반말들. 자연스럽게 서로를 안고 안기고 서로의 일상이 되어가는 모습들. 그 모든 자연스러움 속에서도, 이영애가 연기한 은수는 현실적이지 않게 반짝였다. 은수 같은 사람이라면, 그 전제를 붙이면 은수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저런 목소리로 전화하고, 저런 얼굴로 찾아와서 저런 표정을 짓는데, 어떻게 안 사랑하고 배길 수 있겠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은수를 보면서 영화 '500일의 썸머'의 썸머가 많이 생각났는데, 변해 버린 은수를 비난하는 후기들을 별로 보지 못한 건 아마도 은수가 너무나 압도적으로 빛이 나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썸머가 빛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썸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도 또 없지) 은수의 영화 속 모든 표정과 목소리, 분위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큰 요인도 아마 은수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장면


그렇지만 은수만 돋보였다 하기에는 유지태도 너무나 상우 그 자체였다. 그 모든 다정한 표정들과 목소리와 손길들, 말로는 다 옮길 수 없지만 유지태와 착 달라붙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한다. 재미없는 사람 안 좋아하는데, 저런 재미없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사랑에 빠지고도 남겠다고 생각했다. 상우와 은수가 짓는 그 모든 표정들과 몸짓들과 대화들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저렇게 청춘을 기록한 작품이 남는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오래 흘러 다시 꺼내보았을 때, 저렇게 찬란하게 한 시절을 기록한 작품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나 역시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순간들을 누군가 담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누군가 담아주길 바라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은 비밀스러워서 아름답겠지. 시간이 흘러도 선명하게 남는 무언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기억 속에서 적당히 흐려지게 놔두는 쪽이 더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이 감성 되살리는 것 가능할까


 지금 이 영화를 찍는다면, 어떤 배우들이 잘 어울릴지 생각했다. 더 이상 CD를 돌리지 않는 지금 이 시점에서, CD가 등장하는 그 모든 장면들은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까. CD를 쓰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큰 것도 아니면서, 여전히 오래된 이 영화의 감성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연출이나 배우들의 연기가 비슷하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에 맞는 소품들로 이 영화를 찍는다면 지금 느낀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까. 글쎄, 전화로 비 와서 못 간다는 거짓말을 하려고 CD로 비 오는 소리를 틀어놓고, 그 앞에 앉아서 숨죽여 웃던 감성을 뭘로 대체할 수 있을까. CD를 빼 놓고는 말할 수 없는 이 영화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CD를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는 무엇일까를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은수와 상우의 감정선에 공감하면서 지나간 우리의 사랑을 마치 영화처럼 그리게 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나도 저렇게 아름답고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지 - 어쩌면 실제의 과거보다도 더 아름답게 회상하게 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살다 보면 과거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들도 있으니까. 괜히 사연 많아지고 싶은 날에, 비 조금 오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보면 와르르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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