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정기 재산공개, 인사이동 등 예정된 이벤트가 끝나면 언제 바빴냐는 듯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스트레스받는 날들이 이어진다. 다방면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살피며 여러 아이템을 들고 있는데 틈이 나지 않아 기사를 못쓰는 기자들도 있겠다. 솔직하게 말하면 대체로 나는 그렇지 못하다. 공사를 분리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관심사는 공사가 분리된 편이고, 사람 만나는 일을 동경하면서도 혼자 있어야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편이다. 그래 사실 다 핑계일 거다. 연차가 쌓이고 더 많은 기사를 보고 들으면서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그렇다. '저런 기사는 쓰지 말아야지'가 많아지는데 내 역량은 그 속도를 못 따라가니 운신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다.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한 달 앞뒀던 지난 3월, "선거 끝나면 뭐하지"를 고민하다가 팀장이 "정보공개센터(이하 정공센)에서 무슨 데이터가 있다는데 한번 보자네" 말하는 걸 듣고 무작정 같이 가겠다고 했다. 더 많은 사람, 안 듣던 얘기를 들으면 생각이 좀 트일까 했다. 18일 정공센을 방문해 활동가님과 오마이뉴스 이종호 선배, 팀장까지 넷이 둘러앉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눴다. 요약하자면 정공센에서 다른 프로젝트를 하다가 기획재정부 인사카드, 발령 대장을 열람하게 됐는데 이걸로 뭐라도 할 수 있을까였다. 문제는 유실된 정보가 많았고, 전수를 확인할 수 없었고, 연도에 따라 공개된 정보가 상이했다. 이날 저녁 첫 생방송 출연을 앞두고 있던지라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회의를 끝내고 팀장과 사무실을 돌아가면서 이러 저런 것들을 해볼 수는 있지 않겠냐 얘기했지만 그때만 해도 이게 내가 쓸 기사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4월은 선거 결과 분석 기사 두 편, 5월은 온라인 데이터 저널리즘 스쿨 개편에 집중했다. 다음 기사 준비는 생각도 못하고 불태웠다. 스쿨 개강 후 휴가를 다녀온 6월 1일, 그제야 기획재정부 아이템이 생각났다. 다시 살펴본 정공센 자료는 부족했고, 기획재정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 저런 거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써놨던 것들은 부실했다. 기획재정부 인사 기록과 관련해 어떤 논문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기존의 구멍 난 자료를 살펴보면서 궁금한 것들이 떠오르는 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6월은 기획재정부 정보공개 청구의 달이었다. 자료 공개를 기다리면서 기재부 내에서 부서를 이동할 때 어떤 경향이 있는지, 파견 이후 인사 이동은 무엇이 다른지, 흔히 말하는 요직은 과연 요직인 건지 자료를 뜯어봤다.
6월에 남겨뒀던 <생각 메모>들을 살펴보면 '어공->늘공 패턴 있나', '징계내역 대조', '육아휴직 이후 발령 보직', '비고시가 오르지 못하는 보직' 등 최종 출판된 기사와는 많이 다른 맥락의 고민들이 남겨져있다. 막연하게 Sankey Diagram을 써야 시각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러 시각화 사례들도 남겨놨다. 한눈에 조직 변화를 보겠다며 08년 이후 기획재정부 조직도를 연도별로 인쇄해 쭉 이어 붙여 두루마리를 만들고는 한껏 노려보기도 했다. 6월의 기록들은 3월보다 풍부하지만 기준이 없었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7월에 접어들면서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왜 우리는 지금 기획재정부 인사 기록을 분석해야 하는가. 왜 기획재정부 조직을 살펴보는가. "여기가 기재부 나라냐"가 떠올랐다. 여기는 과연 기획재정부 나라일까? 기획재정부의 인사 기록을 살펴보면 기획재정부가 어떤 논리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구성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기획재정부의 영향력은 무엇으로부터 나올까? 질문을 정리하고 나니 해야 할 일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 구멍 난 자료를 버리고 기획재정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인사 기록, 보도자료를 수집했다. 역대 국정감사 중 기획재정부의 막강한 기능과 권한을 지적한 자료를 모두 받아 다시 살폈다. 기획재정부 중심 국가 관료제를 주목한 저널, 연구 등을 찾았다. "여기가 기재부 나라냐"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 현 정부는 기획재정부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왔는지 '금융개혁'이란 무엇이었는지 되짚었다.
문제의식을 세우면 그간 꽉 막혔던 아이템이 술술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매주 다른 생각으로 흔들렸다. 1) 기재부 인사의 특징은 무엇인가 2) 이것은 과연 기재부만의 특징인가 3) 그래서 그것은 왜 문제인가. 한 달. 한 주 전의 고민과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질문이 계속 생각났다. 팀장과 계속 대화했다. 서로의 물음에 답을 찾고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 오래 반복됐다. 팀장이 2주에 하루 사무실 출근하던 때였는데 그런데도 그 시간을 내달라고 그렇게 팀장을 괴롭혔다.
처음 구성안 개요를 써서 팀장에게 공유한 건 8월 24일, 글기사 초고를 쓴 건 10월 22일, 최종 기사를 팀장에게 넘긴 건 11월 23일, 기사가 출판된 건 11월 30일. 같은 말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써보고, 같은 내용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려보고, 같은 단락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배치해봤다. 팀장과 전반부, 후반부로 나눠서 기사를 쓰고 서로 의견을 묻고 반영하고 반복했다. 시각화를 맡은 기자와 셋이서 오롯이 시각화만 논의한 회의만 두 달 가까이 된다. 10,436자의 글기사 <정부 위의 정부, 기재부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출판됐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긴 시간 준비한 기사가 나갈 때 즈음 '기재부 해체 논란'이 생겼다. 연일 민주당 대선 후보가 기획재정부를 때리더니, 기획재정부가 세수 추계에 실패해 국민의힘 인사들도 기획재정부를 때렸다. 어쩌면 "이게 기재부의 나라냐"는 말이 나왔을 때 이미 대선 국면에서 기획재정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될 거라고 예측했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화두가 된 기획재정부 덕에 뜻하지 않게 시의성 있는 데이터 분석 기사를 쓰게 됐다.
인터렉티브도 없고, 영상도 없다. 숱한 사실과 숫자의 나열로 읽힐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렇게 긴긴 시간 이걸 하는데 썼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되짚어 생각해보니 1) 제작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2) 공부할 시간 충분히 가지고 3) 여러 방법들 고민해 가면서 4) 고민이 해결될 때까지 동료와 토론해 기사를 쓰는 경험은 소중하지 싶다.
형식적으로만 필요한 것들은 과감히 버린 면도 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인터뷰, 인사이트 없이 만나야 해서 만나는 사람은 다 뺐다. 잘 알지 못하면서 해석을 붙이기보단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기사는 영상으로 만들고 웹 기사는 힘을 좀 빼고 작성한다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는 조직이다. (연말에 '올해의 보도'를 뽑을 때 후보에 웹 기사는 제외된다. 올해 나는 웹기사만 썼다.) 이번 기사도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우리만 쓸 수 있는 좋은 기사인데 왜 영상을 만들지 않느냐"는 피드백을 받았다. 웹 기사로 썼기에 긴 흐름 속에서도 논리를 잃지 않고 전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역량이 저 일만 여 자의 기사를 20~30분 호흡의 영상으로 만들 수준이 안된다. 출판 후에 짧은 영상을 하나 더해 볼 수는 있겠다 생각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혼자는 엄두가 안나는 중이다.
기사가 나가고 데이터팀 구성원들과 회고를 했다. 1시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을 다시 살펴보니 이번 기사의 가장 의미 있었던 포인트는 이거 같다. (본인 허락받고 귀여워서 기록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 번도 울지 않았어요. 시각화를 어떻게 할지 혼자 고민하지 않고 회의에서 이야기하면 바로 해결책들이 나오니까 스트레스가 적었어요." - 팀 막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