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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사, 다시 하면 잘할 수 있는데

아찔했던 그날의 기억

by 달리

처음으로 여자친구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날, 버스를 타고 서울의 어느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봄 날씨가 포근했고, 하늘도 파랗게 화창했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탓에, 준비한 선물을 카운터에 맡기고는 도로 나왔다. 삼십분쯤 주변 거리를 생각 없이 걷다가 들어와 예약한 테이블에 혼자 앉았다.


여자친구는 결혼 전에 가볍게 한 번 보는 자리일 뿐이니 긴장할 것 없다고 했지만 그 말이 통할 리 없었다. 기다리는 삼십분 동안 몇번이나 화장실 거울 앞에 가서 옷매무새를 다시 만졌다. 사실 더 만질 것도 없이 말끔한 차림새였지만, 그날따라 왠지 넥타이의 매듭각도까지 신경 쓰였다. 나는 그 자리가 결혼을 허락받는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곧 여자친구가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들어왔다. 인사를 드리고 함께 앉아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잊지 못할 사건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땀이 많은 체질인데, 긴장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많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몸에 갑자기 불을 지핀 듯 열이 나기 시작했다. 머리와 얼굴이 땀에 젖어 흥건해졌을 때쯤, 내가 더워서 그런 줄 아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더우면 그 타이를 풀고 셔츠 소매도 걷어요."
"감사합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군인처럼 딱딱한 말투로 황급히 대답하곤 도망치듯 화장실로 가서 땀을 닦았다. 4월 초의 청량한 날씨에 실내에 앉은 채로 이렇게 땀을 흘리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을 여자친구의 가족들이 나보다도 더 걱정됐다. 분명 당황하셨을 텐데. 절대로 이렇게 첫만남을 망칠 순 없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대강 정리하고 서둘러 돌아갔다.


여유로운 척 어색한 미소와 함께 돌아온 자리에서도 땀은 멎을 줄을 몰랐다. '내가 왜 이러지' 생각할수록 몸은 뜨거워졌고, '완전히 망했구나' 생각할수록 마음은 차게 식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땀은 쉼 없이 솟아 나왔다. 살다 살다 내 몸의 땀구멍이 원망스럽긴 처음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두가 차마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식사에 집중했다. 정말이지 고마운 가족이었다.


그날 아버님이 참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평소 말씀이 많으신 타입이 아닌데, 그날은 맞은편에 앉아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예비사위를 보고 안 되겠다 싶으셨던 것 같다.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지만 솔직히 그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이미 멘탈이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식사를 마친 뒤 여자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둘이서 땀 이야기 말곤 할 게 없었다. 분명 고생은 했는데 고생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여자친구의 표정도 참 볼만했다.


"왜 이렇게 땀이 많이 나지? 어디 건강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병원에는 가봤어?"
"응. 나 원래 땀 많은데 긴장해서 더 그런 것 같아."


지레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론 미안했다. 처음 만난 여자친구의 가족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남자친구로 보이고 싶었고, 믿을 만한 사윗감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결혼을 허락받고 싶었고, 무엇보다 내 여자에게 믿음직한 남자로 보이고 싶었다.


이보다 나쁜 첫 만남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위안 삼을 만한 얘기가 있기는 있었다. 기억할지 모르겠으나 그날 아내의 여동생이 아내에게 전화로 이런 말을 했었다.


"엄마랑 아빠가 언니 남자친구 순수해 보인대. 순수한 이미지 때문에 오히려 점수를 좀 딴 것 같아."


나름 좋은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작게 안도했다. 그래. 죽으란 법은 없지. 첫인상이 중요하긴 해도 앞으로 잘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 따위의 생각으로 격렬했던 하루를 마감했다.


이후 우리 부부는 그날의 사건을 반쯤 섞인 농담으로 '4.7 참사'라 부른다. 농담으로나마 이날을 함께 기억할 수 있어서 좋다. 다행히 장인어른, 장모님도 나를 착하고 착실한 사위로 봐주시는 듯하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고, 만회할 수 없는 실수도 없는 법이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다시 하면 이번엔 정말 잘할 수 있을 거란 진한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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