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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01. 2024

낯익은 괴물, 인상적인 호러

최정원, 『폭풍이 쫓아오는 밤』, 창비, 2022

* 쪽수: 255쪽



새해 첫날 잘 보내셨나요. 저는 2024년 첫 책으로 최정원의 청소년 장편소설 『폭풍이 쫓아오는 밤』을 읽었습니다. 출간된 지는 1년 조금 넘은 작품이고, 호러입니다. 17살짜리 주인공 '이서'가 아빠, 여동생과 함께 외딴 수련원에 놀러 오는데, 곧 알 수 없는 이유로 외부와의 통신이 두절됩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나지요. 이야기는 배경이 되는 좁은 공간을 간단히 밀실로 꾸미고는 그곳에서 일어난 하룻밤 동안의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도사린 정체불명의 괴물은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문의 사냥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s』(1902)를 연상케 합니다. 음습하고, 스산하고, 불길하고, 거대하지요. 『폭풍이 쫓아오는 밤』에 나오는 괴물은 어림잡아 높이 3미터에, 발자국 하나가 주인공의 몸뚱어리만 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서는 인간의 신체를 가볍게 짓이길 수 있는 괴물에게 내내 쫓기면서 목숨을 위협받습니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이 정도로 압도적인 괴물은 자연스럽게 어떤 전형적인 전설의 주인공이 됩니다. 바로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라는 전설이지요. 이서가 만난 괴물도 마찬가집니다. 타국의 오지에서 포획되어 비밀리에 한국으로 수입된 이 괴물에겐 으스스한 괴담이 장식처럼 덧입혀져 있는데, 이런 유의 괴담이 늘 그렇듯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게 평범한 인간의 공포심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자극하는가죠. 그런 점에서 이 괴물을 둘러싼 이야기는 서사 전반에 걸쳐 잘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괴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에 있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이야기의 주제를 구체화하는 방식과도 알맞게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괴물이란 말은 흔히 한 인간이 가진 양면성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은유적으로 쓰이기도 하잖아요. 이 이야기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주인공들은 형체를 지닌 괴물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할 뿐 아니라, 자기 내면에 어둡게 뿌리내린 감정을 직면하고 그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이야기는 이 이중의 싸움을 절묘하고도 아슬아슬하게 연결 짓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주로 이서의 동선과 감정을 따라 전개됩니다. 그러다 중간중간에 또 다른 주인공 '수하'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두 인물이 지닌 아픔은 모두 가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서의 엄마는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이서는 지금까지 그게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차 안에서 이서가 진심이 아닌 모진 말로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고 이후 이서의 손등에 남은 흉터는 그대로 죄책감이 되어 이서를 마음속 동굴로 움츠러들게 하지요. 한편 수하의 내면에는 자신과 엄마를 지독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그 사람'에 대한 공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하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건 자기 안에 '그 사람'을 닮은 폭력적 기질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점이고요. 이야기는 그런 두 인물이 힘을 합쳐 괴물에 맞서는 과정에서 차츰 자기 내면의 두려움을 깨닫고 극복하는 결말로 나아갑니다.


구조적으로 단순한 만큼 몰입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이서와 수하 외에 모든 등장인물이 기능적으로 세팅되어 있고, 배치도 굉장히 효율적이고 거침없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인물을 괴물의 희생양으로 삼는 데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고, 전 그게 이 작품에서 아주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라이맥스에서는 급기야 괴물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비열한 악당에게 자기가 잡아 삼킨 인간들의 시신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너무나 불결해서 마냥 통쾌해할 수 없는 이런 장면은 한국 청소년문학에서 가히 유례가 없었던 유의 것이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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